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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아우슈비츠 기억하듯, 광주 잊지 않길 바랐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둥글고 둥글게(Round and Around)’에서 1980년 5월 당시 광주 시민들이 전라남도청 앞 분수대에 둥글게 모여든 모습의 기록물을 흑백 반전시켜 담아낸 장면이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둥글고 둥글게(Round and Around)’에서 1980년 5월 당시 광주 시민들이 전라남도청 앞 분수대에 둥글게 모여든 모습의 기록물을 흑백 반전시켜 담아낸 장면이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검은 화면 가득 타오르는 촛불 하나, 이어지는 88서울올림픽의 화려함 뒤로 1980년대 맨손의 산업역군이 공장기계 사이를 오간다. 노동자들의 그늘진 죽음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시간을 거슬러간 기록영상 속엔 80년 5월 광주가 떠오른다.

5·18 40주년 기념작 ‘둥글고 둥글게’ #장민승 작가, 정재일 음악감독 협업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시편 89:48) 부상자들마저 취조했다는 옛 국군 광주병원 폐허 장면과 함께 성경의 시편을 담은 라틴어 합창곡이 흐른다. 객석에서 낮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올해 제40회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울렸던 25분여 헌정 영상 ‘내 정은 청산이오’를 100분으로 확장·변주한 후속작 ‘둥글고 둥글게(Round and Around)’가 지난달 29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첫 공개됐다. 이번 영상을 맡은 장민승(41) 작가와 ‘옥자’ ‘기생충’ 등 영화·뮤지컬 음악으로 이름난 음악감독 정재일(39)을 첫 상영 직후 만났다.

25년 지기인 두 사람은 2009년 옛 기무사령부 터에서 열린 ‘A.인터미션’ 전시로 협업을 시작했다. 파도치는 검은 바다를 응시한 영상으로 에르메스 미술상을 차지한 ‘보이스리스’(2014), 1000일간 한라산의 혹독한 풍광을 담은 ‘오버 데어’(2018) 등 협업 작품마다 세월호, 4·3사건 등을 위령하는 듯하다고 평가받은 둘이 이번엔 그날 광주를 다뤘다.

“제 아버지(5·18을 처음 다룬 대중영화 ‘꽃잎’의 장선우 감독)도 5·18 직전 끌려간 적 있고 주위에 그런 분들이 많아 오히려 회피하고 싶었지만 이번 작업을 맡으며 뭔가 이끌림과 책무를 느꼈어요. 은유적 방식을 택해온 전작들과 달리 정면돌파를 다짐했죠.”(장민승 작가)

“음악 시작 즈음부터 김민기 등 민주화 운동 예술가와 교류가 있었어요. 망월동 묘지에서 기타도 쳤고요. 보훈처 의뢰를 받곤 한국 현대사적 사건에 저 같은 조무래기가 헌정해도 될까, 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죠. 독일이 아우슈비츠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기에 지금의 독일이 됐듯, 중요한 건 다음 세대가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었어요.”(정재일 음악감독)

제목과 관련해 장 작가는 “80년대는 둥글게, 둥글게 살지 않으면 붙들려 가는 시대였고 반대로 지금 사람들은 개인적인 분노에 가득 차 예민한 것 같다. 조금 둥글게, 둥글게, 그런 모습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있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이 일하다 다치고 죽는 나라죠. 돌고 돌아 제자리인 듯한 허망함도 느껴요.”

정 음악감독은 “음악적으론 기괴하고 무자비한 소리를 시도했다”고 했다. 80년대 상흔 위에 쌓아 올린 올림픽 매스게임 장면이 “끔찍하게 느껴졌다”며 “여러 음악적 대조를 주길 원했고 더 무자비한 사운드와 천상의 음악 같은 합창이 상반되게 들리길 바랐다”고 덧붙였다.

계엄군에 폭도로 규정된 광주 시민들이 고통받은 옛 국군 광주병원, 옛 광주교도소의 잡목이 우거진 폐허 등이 아스라하다. 민주화 시위 장면에선 객석을 향해 취조실의 전기불 같은 강한 조명을 비추기도 한다.

시편을 떠올린 건 “간곡하고, 주님께 탄원하는 것 같기도 해서”(장 작가)라 한다. “광주를 논리적, 역사적으로 이해 못 해도 뭔가 느끼고 기억하면 좋겠다 싶어서 시편 중 마치 계엄군에 쫓기고 죽어갔던 누군가의 기도처럼 느껴지는 30편 가운데 음악감독이 12편을 골랐죠.”

헝가리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 & 콰이어’와 함께한 시편 합창 15곡, 오케스트라 15곡이 국악 소리꾼 정은혜의 목소리와 어우러진 대목들은 신묘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둥글고 둥글게’는 오는 5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2회(오후 2시, 6시) 무료 공연된다.

광주=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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