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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m 세한도 재해석한 프랑스인 “무인도 같은 고독에 공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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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세한-평안' 전시 걸개 앞에 선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세한-평안' 전시 걸개 앞에 선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은 전시실 입구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낯선 흑백 영상으로 시작한다. 을씨년스러운 제주의 바람과 파도, 쉼 없이 거미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소나무숲 등이 병렬 스크린에 나눠 투사된다. 관객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며 남긴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만나기에 앞서 그가 느꼈을 유배지의 고독과 자연 교감을 이 7분간 간접 경험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 #특별전 7분짜리 영상물 제주서 촬영 #추사 작품에 달린 수많은 감상평 #“그때와 지금 사람 심정 다르지 않아”

추사 김정희 말년의 걸작 ‘세한도’는 원래 70㎝ 가량 그림(표시 부분)이지만 청나라, 조선 문인 등 20명이 감상문을 붙이면서 14m 69.5㎝가 됐다. 두루마리 중간 공백은 다른 문인 글을 받기 위해 남겨둔 공간으로 추정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 말년의 걸작 ‘세한도’는 원래 70㎝ 가량 그림(표시 부분)이지만 청나라, 조선 문인 등 20명이 감상문을 붙이면서 14m 69.5㎝가 됐다. 두루마리 중간 공백은 다른 문인 글을 받기 위해 남겨둔 공간으로 추정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세한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이 영상물을 제작한 이는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36). 지난 8월 박물관 측 의뢰를 받고 9월 중순 입국, 2주 자가격리를 마친 후 제주도에서 2주간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만들었다. 2013년부터 5년간 국민대 영상디자인학과 애니메이션 조교수를 해서 한국 생활은 익숙하지만 한국 문인화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세한도’는 이름만 들어본 상태였다. 영어로 된 논문을 읽으며 김정희라는 인물을 알아갔고 한라산 성판악에서부터 관음사까지 두차례 오르내리며 체험·관찰한 자연 위주로 영상을 엮었다. 추사 유배지를 재현한 서귀포시 대정의 추사적거지는 “너무 현대적 분위기라서” 소품 일부만 활용했다.

“세한도는 유배당한 지식인이 9년 가까이 불행을 버티면서 옛날 제자가 보내준 책을 받고 감사를 표한 그림이잖아요. 본인은 이게 위대한 작품이 될지 몰랐을 것 같아요. 그런데 중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감동했고 그걸 감상문으로 남겨서 14m 넘는 길이가 됐죠. 무얼 봤기에 그랬을까, 그 느낌을 살리려 했어요.”

제주 촬영 전에 자신이 거주하는 프랑스 보르도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임시로 찍어봤다고 했다. “세한도에 그려진 것 같은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단다. 작은 무인도에도 들어가 봤다. “현대 문명과 단절되니 몇 세기 전과 오늘날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세한도에 많은 감정이 있겠지만 외로움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요. 요즘 우리도 코로나19 때문에 외로운 도시에 사는 상황이라서 더 크게 와 닿았어요.”

국보 180호 ‘세한도’. 올 초 실업가 출신 손창근(91) 선생이 국가에 기증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80호 ‘세한도’. 올 초 실업가 출신 손창근(91) 선생이 국가에 기증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방인인 그의 렌즈에 담긴 풍경은 대사 한마디 없이도 추사에 대한 공감을 드러낸다. 스산한 분위기는 “인생 백 년은 참으로 꿈과 환상이라 슬픔과 기쁨, 얻음과 잃음을 물어 무엇하랴”라고 했던 오세창(1864~1953) 선생의 감상문과도 공명을 일으킨다. 달리 보면 ‘세한의 시간’ 역시 세한도에 덧붙인 영상 형태의 감상문인지 모른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사실 한국의 국보 앞에 영상을 놓게 되니 제가 잘 이해한 건지 걱정스러웠어요. 우리도 요즘 유튜브 볼 때 다른 사람 댓글 보는 걸 즐기잖아요. 세한도의 감상문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 의견 궁금해하는 건 비슷하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위당 정인보(1893~1950)의 글까지 총 20인의 문인 감상이 덧붙여진 세한도 두루마리 전체가 공개된 것은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이후 14년 만이다. 푸스 역시 영상 작업을 끝낸 뒤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실물을 봤다. “비유적인 그림이란 건 알지만, 유배 중인 집을 창문 하나만 달랑 그린 게 그 집이 미워서 간단히 그린 걸까 궁금했다”면서 “아직도 미스테리가 많은, 해석 못 한 그림이다. 나도 작품을 하다 보면 넣는 것보다 빼는 게 중요한데, 추사는 최소화한 것을 더 최소화한 것 같다”고 품평했다.

“아무리 세계적인 작품이라도, 예컨대 에밀 졸라 소설이라 해도 배경 지식이 없으면 왜 그렇게 위대한지 공감할 수 없잖아요. 세한도 역시 작품에 맞물린 편지와 다른 스토리들, 그리고 역사적으로 파괴될 위험도 있었는데 가까스로 보존된 것 등이 맞물려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부모님이 각각 프랑스어와 중국어 교사인 푸스는 중국 우한(武漢)에서 태어나 6세까지 자랐다. “작년까진 프랑스인들에게 설명해도 몰랐는데 올해 다 알아듣는 도시가 됐다”면서 웃었다. 홍콩에서 고등학교를 나오는 등 아시아권 문화에 익숙하고 부모님 집엔 서예 작품 등 컬렉션도 상당하다고 한다. 프랑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전공 후 만든 졸업작품이 부천국제학생영화제(PISAF)에 출품된 걸 계기로 한국을 오가다 2013년 애니메이터 민성아 작가와 결혼했다.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제주 해녀를 소재로 만든 단편 ‘울림(Résonances)’이 다수 영화제에서 호평받기도 했다. 당분간 국내에 머물면서 한국 미혼모 실태를 담은 다큐·애니메이션 작업을 계획 중이다. ‘세한·평안’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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