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 있다면 재판부 부덕"···'전두환 집유' 판사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2020.11.30 20:36

업데이트 2020.11.30 21:12

30일 오후 1시55분 광주지법 201호 법정. 전두환(89) 전 대통령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와 관련된 1심 선고 공판을 5분 앞두고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정훈 부장판사가 재판정에 들어섰다.

이례적으로 5분 일찍 들어서 판결 취지 설명
"사자명예훼손 넘는 처벌은 양형 재량 넘어"

 김 부장판사는 “방청객과 취재진에게 전할 말이 있어 5분 일찍 들어왔다”며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높음을 알고 있다”며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려고 노력했고 만약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재판부의 부덕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날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에 쏠린 관심 알고 있다”

30일 오전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회원 등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고(故) 조비오 신부를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비난한 혐의로 기소돼 이날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30일 오전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회원 등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고(故) 조비오 신부를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비난한 혐의로 기소돼 이날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재판부가 재판 시작보다 일찍 들어와 판결 취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모든 이들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선고 결과를 법적인 관점 혹은 다른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지만, 재판부의 결론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경청해달라”고 했다. 김 판사는 이 말을 마친 후에야 100여 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1시간 동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죄지만…집행유예 2년 왜?

 김 부장판사는 이날 전 전 대통령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왜 집행유예 판단을 내렸는지를 판결문에서 10여 쪽 이상 분량을 할애했다. 그는 “피고인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용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에게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하는 것은 양형 재량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이 5·18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날 재판이 모든 5·18 피해자들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재판은 아니기에 사자명예훼손죄의 범주를 넘어서는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재판의 쟁점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였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꼽았다. 80년 5월 당시 사상자 발생에 따른 법적 책임을 지금에 와서 물릴 수 없다는 게 김 부장판사의 설명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5·18 당시 사상자들에 대해서는 1997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무기징역 판결이 확정됐기 때문에 다시 처벌할 수 없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된다.

“역사적 의미만으로 엄벌 어려워”

30일 오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전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이날 1심 재판부로부터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연합뉴스

30일 오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전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이날 1심 재판부로부터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연합뉴스

 전 전 대통령은 5·18 당시 헬기사격을 주장해온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죄)로 기소됐다. 사자명예훼손죄의 양형 기준은 최대 징역 2년, 벌금 500만원이다. 검찰은 지난달 결심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한 바 있다.

 김 부장판사는 “이 사건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미는 양형에 있어서 부차적으로 고려돼야 할 요소로 사정만으로 피고인을 엄벌할 수 없다”며 “진실을 말한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표현함으로써 침해된 피해자의 법익의 관점에서 형을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판결 후 최근 발의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이 소급 적용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나왔다. 지난달 27일 발의된 개정안에는 5·18을 왜곡·날조한 사람에 대해 7년 이하 징역 또는 7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전두환 회고록』은 2017년 출간돼 소급적용이 불가능하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벌금형은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김 부장판사는 “벌금형이 선고되면 노역장 유치 집행을 통해 벌금 납부를 강제하지만, 70세 이상은 형 집행을 정지할 수 있다”며 “강제집행을 하더라도 벌금액을 훨씬 초과하는 거액의 추징금 납부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피고인에 대해 실효적인 처벌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30일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이 1심 선고 직후 광주지법 정문을 빠져나가자 5·18 단체 회원들이 계란과 밀가루를 차량에 뿌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30일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이 1심 선고 직후 광주지법 정문을 빠져나가자 5·18 단체 회원들이 계란과 밀가루를 차량에 뿌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재판 말미에 남긴 판사의 쓴소리

 하지만 김 부장판사는 이날 1심 선고를 하기 직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전 전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그는 “지금도 5·18로 고통받는 많은 국민들이 있다”며 “피고인처럼 역사를 왜곡하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자세는 과거가 아닌 현실로 다가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했다.

 그는 “피고인을 징역 8개월과 집행유예 2년에 처한다”는 1심 선고와 함께 “피고인은 판결 선고를 계기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진심으로 사과하길 바란다”며 선고 공판을 마쳤다.

광주광역시=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