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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아파트 환상’이란 말은 직무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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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정책팀 차장

하현옥 경제정책팀 차장

“나도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데 그럼 나도 전지현이냐.”

아파트 담장이 가른 주거 인프라 #수요자에 비용 전가한 정책 산물 #“도시민의 삶의 양식 이해 필요”

지난 20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매입 임대주택을 둘러본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미래주거추진단장이 “방도 3개가 있고 해서 내가 지금 사는 아파트와 비교해도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하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방 개수만 똑같으면 ‘아파트=빌라’냐는 반문이다.

진 의원은 서울 강동구의 신축 아파트(전용면적 84㎡)에 임대인으로 살고 있다. 지하철 5호선 명일역의 초역세권에 자리 잡은 1900세대 아파트다. 아파트와 ‘전혀 차이가 없다’는 매입 임대주택은 LH가 민간이 지은 빌라나 오피스텔을 사들여 임대로 공급하는 곳이다. 이날 방문한 곳은 서울 동대문구와 강동구의 5층 건물에 있는 각각 31~75㎡, 41~49㎡(전용면적) 규모의 임대주택이다.

진 의원은 새 별명도 얻었다. ‘마리 진투아네트’다. “아파트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 임대주택으로도 주거의 질을 마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발언 때문이다. “아파트가 없으니 빌라에 살라는 것”이냐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던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빗댄 것이다.

그의 한마디에 아파트에 살려는 이들은 환상에 사로잡힌 존재가 돼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자산이자 신분재인 아파트의 특수성을 감안해도 이런 폄하는 억울하고 부당하다. ‘아파트 환상’은 공공 공간을 방치한 국가의 직무유기 속에 서민들의 현실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인 박인석 명지대 교수는 저서 『아파트 한국사회』에서 “아파트 개발은 도시 기반시설에 대한 공공투자를 최소화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주택과 도시를 개발하기 위한 정책수단으로 간주됐다”고 지적했다.

국가나 공공이 공원 녹지와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요자에게 비용을 떠넘겨 녹지와 놀이터, 주차장 등을 갖춘 괜찮은 ‘동네와 집’을 만들어냈다는 설명이다. 반면에 아파트 담장 밖의 일반 주택지는 방치됐다. 박 교수는 “아파트의 비교우위는 아파트 기반시설의 차이”라고 했다.

일반 주거지역의 환경은 열악하다. 보안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골목과 도로는 주차 전쟁터다. 공원이나 놀이터도 가뭄에 콩 날 수준이다. 도서관이나 운동시설 등은 언감생심이다. 상가 등의 편의시설도 비교가 어렵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시무 7조’ 등을 올린 진인(塵人) 조은산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4년간 빌라촌에 살 때 주차 고민에 퇴근길이 스트레스였고, 차 빼달라고 할까 봐 집에서 술 한잔도 마음 편히 못 마셨다”며 “서민들도 학군·교통·주변 환경·편의시설이 필요한데 (그런 걸) 따지면 안 되냐”고 말했다.

이런 욕망을 ‘아파트 환상’으로 치부한 문재인 정권은 양질의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해결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아파트의 비교우위 요인인 주거 인프라 개선에 대한 고민과 노력은 없다. 그저 임대주택의 질을 높이겠다며 정부는 제도까지 바꿔 가며 대형 건설사에 다세대·다가구 임대주택을 공급하라고 팔을 비틀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양질의 임대주택 공급 명분에 대형 건설사가 골목상권에 뛰어들 판이다.

‘아파트 환상’ 운운하며 열악한 주거지로 몰아넣는 것은 시장과 서민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걸 내 방식대로 주는 정권의 오만과 직무유기다. 귀결은 뒤틀린 결과다. 임대차 3법 등 각종 정책의 역풍 속, 한국 아파트를 연구한 프랑스 학자의 말이 마음에 더 와닿는 이유다.

“주민은 자신이 원하는 주택을 꿈꾸고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산을 모으려 노력하고, 거주하기 적당한 장소를 골라 살기 좋은 집을 짓겠다는 구상을 한다. 실제 도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들이다. 따라서 주민들의 삶의 양식에 대한 조사 없이 도시 형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발레리 줄레조 『아파트공화국』)

하현옥 경제정책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