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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감시와 협박 빼면 K 방역엔 뭐가 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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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출근길 서울 시내버스를 탈 때마다 마음이 안 좋다. 비좁고 밀폐된 데다 붐벼 코로나19 전염 위험이 가장 높은 대중교통 차량 안에서 마스크를 끼고 있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데, 눈 돌리는 곳마다 붙어있어 외면하기 어려운 협박성 포스터 탓이다. ‘마스크 미착용 시 10만원 과태료 지급’ 같은 경고성 포스터는 차라리 견딜 만하다. 확진자가 치솟자 서울시가 ‘천만시민 긴급 멈춤 기간’이라며 제작한 포스터 중 하나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누워있는 환자 사진과 함께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며 겁을 준다. 빨간색 코로나바이러스에 폭탄 도화선을 그려 넣고는 ‘코로나19가 모든 걸 멈추기 전에 우리가 먼저 멈춰야 합니다’라고 쓴 포스터는 또 어떤가.

망신주기·겁주기가 K 방역 핵심 #병상·백신 확보 안하고 국민 탓만 #코로나 종식 정말 원하기는 하나

정말 긴급하게 모두가 멈춰야 하는 위기상황이라면 서울시가 대중교통 운행부터 중단하고 후폭풍을 책임질 일이지, 왜 방역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른 채 생업을 위해 혼자가 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민이 출퇴근길에 이런 협박 포스터를 보며 코로나 블루(우울증)를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느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책임 전가와 윽박지르고 겁주기 수법으로 따지자면 문재인 정부가 서울시보다 한 수 위다. 방역을 빌미로 국민에 대한 감시와 협박을 일상화하면서 ‘확진자 수가 줄면 정부 덕분, 늘면 국민 탓’이라는 프레임으로 전체주의적인 통제를 점점 강화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질병 앞에서 가장 필요한 과학적 판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결과 코로나라는 병에 대해 알아가면서 일상이 조금씩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은 언제라도 튀어나오면(코로나에 걸리면) 망치로 두들겨 맞는 두더지 신세로 전락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돌이켜보자. 지난 1월 국내에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이후 초기에 감염원을 막자는 전문가 의견에 귀를 막은 문재인 정부는 ‘망신주기’를 가장 강력한 방역 대책으로 내세웠다. 감염 확산 방지에 필요한 확진 전후 동선뿐 아니라 성별, 연령, 거주지 등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까발려 환자를 근거 없는 루머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코로나 자체보다 정부가 부추기는 코로나 낙인이 더 무서워 모두 스스로 알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국민과 의료진이 희생해서 확진자 수를 눌러놨더니, 정작 문재인 대통령은 “방역과 경제를 다잡겠다”며 소비쿠폰·여행쿠폰 뿌리고 코로나 종식이라는 희망 고문으로 국민을 현혹했다. 결과는 확진자 폭증이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대통령의 실책을 가리려 ‘윽박지르기’ 전략을 구사한다. 시위 후 코로나 사망자가 나왔다고 이 정부 사람들은 반(反)정부 시위 주동자만 콕 집어 “살인자”(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라거나 ‘잔존감염’이라는 이상한 단어를 만들어 코로나 방역을 정치적 반대파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요술봉처럼 쓴다.

망신주고 협박하는 건 조폭이 제일 잘한다. 조폭 수준을 넘는 제대로 된 정부라면 코로나 장기화를 대비해 병상을 꼼꼼하게 챙기고 백신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은 정반대다. 잠시 확진자가 줄었다고 현장 의료진의 반대에도 감염병전담병원 지정을 해제해 오히려 병상을 줄인 게 이 정부다. 언제는 백신 나올 때까지 감시가 핵심인 K 방역으로 참고 견뎌야 한다더니, 정작 백신이 나오니 서두를 필요가 없단다. “과잉 주문은 예방책”이라며 인구 3800만명인 캐나다가 무려 11억 회분의 백신을 확보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쯤 되면 이 정부가 진짜 코로나가 빨리 잡히기를 원하는지조차 헷갈린다.

코로나가 수반한 다른 사회적 문제에도 완전히 손을 놓았다. 올 3~7월 호흡기감염 환자가 51.9% 감소하는 등 모든 진료과 환자가 줄었지만 격리 피로감에 정신과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1% 늘었다. 특히 20대 여성 자살이 크게 늘어 올 1~8월 전체 자살 시도자 가운데 32.1%가 20대 여성이었다. 학교 문을 닫아걸면서 발생한 아동·청소년의 학력 저하는 더욱 심각하다. 최근 발표된 미국 논문은 코로나로 학교 문을 닫은 게 학력 수준 저하로 이어지고, 장기적으로 저소득층의 기대 수명을 낮춘다는 연구결과를 보여준다. 최근 부산시교육청 조사를 보면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이처럼 정부가 자화자찬하는 K 방역은 지금 확진자 수도 못 잡은 채 자영업자만 죽이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의 정신건강을 해치고, 특히 실업률이 치솟은 20대 여성에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청소년의 미래를 좀먹고 있다. 이게 감시와 협박을 빼고 남은 K 방역의 민낯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