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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나를 배가 없다, 공장에 쌓인 트랙터 1000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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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지난 25일 전북 익산의 동양물산기업 출하장에 수출용 트랙터 870여 대가 대기 중이다. 미국으로 가는 화물 컨테이너를 구하지 못해 공장 관계자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 김영주 기자

지난 25일 전북 익산의 동양물산기업 출하장에 수출용 트랙터 870여 대가 대기 중이다. 미국으로 가는 화물 컨테이너를 구하지 못해 공장 관계자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 김영주 기자

지난 25일 전북 익산의 왕궁농공단지. 농기계 제조업체 동양물산기업의 출하 대기장은 트랙터 870여 대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150~200대)보다 훨씬 많은 물량이다. 공장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니 빨간색 ‘메뚜기떼’(트랙터)가 누런 평야에 내려앉은 듯한 모양새다.

수출용 컨테이너 구하기 ‘대란’ #“미국 주문 폭주하는데” 발만 동동 #운임 1.5배 폭등에도 배 못 구해 #대기업보다 중소·중견기업 심각 #정부도 뾰족한 대책 없는 상황

김형준 동양물산 출하 담당은 “미국 수출용인데 선적을 못 해 쌓아뒀다. 해외사업부에서 선적할 컨테이너가 없다고 연락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사흘 치 생산량까지 더하면 대기 물량이 1000대를 넘을 것”이라며 “차가 다니는 길에도 트랙터를 세워놓아야 할 판”이라고 덧붙였다.

동양물산은 통상 한 달에 1000대 이상의 트랙터를 미국으로 수출한다. 길이 40피트(약 12m) 컨테이너를 기준으로 100여 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미주 노선에서 화물 운임 폭등과 화물선 공간 확보의 어려움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수출용 컨테이너를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은 대기업보다 중소·중견기업에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9월 이후 미주 노선의 해운 운임은 크게 올랐다. 그래도 컨테이너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이달 들어 동양물산이 지급한 컨테이너당 운임 단가는 미국 서부가 3520달러, 동부는 5093달러였다. 지난 4~8월에는 서부가 2020달러, 동부가 3333달러였다.

동양물산은 5~6개월 단위로 물류주선(포워딩) 업체와 계약을 맺지만 최근에는 미주 노선의 기존 계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올해 상반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줄어든 물동량이 하반기 들어 폭증한 게 원인이다.

특히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물동량이 크게 늘었다. 중국 동부에서 출발한 화물선이 부산을 건너뛰고 바로 미국으로 가는 경우도 많아졌다. 중국에서 실은 화물만으로 배가 꽉 차기 때문이다. 국적 선사인 HMM(옛 현대상선)이 올해 띄운 2만4000TEU(1TEU=20피트 컨테이너 한 개)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은 유럽 항로에 투입하고 있다. 글로벌 해운 운임도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 27일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2048.2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하이-미국·유럽 컨테이너선 운임.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상하이-미국·유럽 컨테이너선 운임.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반면 미국에서 소형 트랙터 수요는 폭발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가정에 머물며 잔디 깎기 등을 하는 시간이 늘면서다. 그래서 동양물산 같은 업체에선 배가 없어 못 싣는 상황이 더 속이 탄다.

이주영 동양물산 공장장(이사)은 “미국 사람들은 소형 트랙터에 ‘모어’(잔디 깎는 기계)를 장착해 쓴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하반기에 내년 물량을 거의 수주했다”며 “‘이상 수요’라고 할 정도로 뜻밖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LS엠트론 관계자도 “코로나19로 ‘하비 파머’(취미 목적 농사꾼)가 증가하면서 미국에서 주문이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박양균 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수출기업의 애로사항을 접수해 정부 부처에 전달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며 “최근 화물안전 운임제 도입으로 부산항까지 가는 물류비와 미국 내 육상 물류비도 올라 중견 수출기업은 삼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진해운의 파산으로 글로벌 해운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낮아진 점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양종서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원은 “HMM이 글로벌 해운동맹 ‘디얼라이언스’에 가입했지만 아직 한진해운보다는 힘이 약하다”고 말했다.

익산=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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