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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밤을 잊은 그대에게…잠 부르는 산막의 소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68)  

밥 먹읍시다. 양푼 비빔밥. 보리밥에 무채, 갓김치, 애호박 볶음에 고추 부각을 넣고 고추장에 된장국 들기름을 넣어 마구마구 비벼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비빔밥이 완성된다. 한 숟가락 가득 담아 입에 넣고 잘 구운 갈치구이 한점 보태면 들깨 향에 각종 재료의 어우러진 맛이 어우러져 늦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곡우는 버려진 밭의 배추를 뽑고 나는 또 다른 비빔의 재료가 될 배추의 사각거림을 마음으로 음미한다. 겨울을 맞는 산막은 참 쓸쓸하다. 나는 그 쓸쓸함을 더욱 사랑하여 또 슬프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4년 전에 포크레인 체험을 했다. 포크레인 주인인 동생의 글을 보고 잊혔던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다시 내 마음은 꿈틀거린다. 사는 게 망설여진다? 그럼 임대라도 해볼까?

“내 포크레인을 보고 형도 하나 사서 산막을 다듬는 데 사용하고 싶다 하기에 내가 완곡히 그리하지 말고 장비가 필요할 때 사람 불러다 쓰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만한 돈이야 충분히 있겠지마는 포크레인 관리는 자동차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기에. 처음 중장비를 만져보면 그 엄청난 괴력에 바로 매료되고 만다. 그래서 한 대쯤 소유하고 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작업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소유욕이 듬뿍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디젤엔진 관리와 유압 시스템 관리, 거기에다가 중장비이므로 꼭 따라다니는 용접과 절단 등의 쇠붙이를 만져야만 하는 고도의 기술적(?) 기능을 자가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만 즐거운 동반자가 될 수 있지. 그렇지 못하다면 그놈의 장비 생각만 해도 골머리 딱딱 아픈 애물단지를 모시고 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수시로 정비를 해주는 성의에 아직도 큰 탈 없이 잘 굴러가는 이놈이 나에게는 효자이자 동반자이다.”

그동안 SNS에 천착하느라 책 읽기를 많이 소홀히 했다. 무언가 허전했고, 좋은 글도 나오지 않았다. 오늘 따사로운 햇볕 아래 책 한권을 마주하고 독서삼매에 빠져본다. 『매혹과 슬픔-내 영혼의 시베리아』. 최돈선 선생이 쓰고 허영 선생이 찍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까지의 문학과 역사를 넘나드는 여행의 기록이다. 몇 년 전 합창단과 함께 고려인 위문공연을 다녀왔고, 또 언젠가 지인들과 함께 시베리아 여행을 한 적도 있어 글 하나 상황 하나에도 짙은 공감과 향수를 느낀다. 독서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한 줄 읽고 한참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우수리강에, 이르쿠츠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문다. 나라 잃고 강제 이주에 내몰렸던 동포의 피 끓는 절규와 항일 독립운동가의 처절한 몸부림과 희생을 기억한다. 국가가 무엇이고 나라가 무엇이냐는 담론에 앞서, 왜 두 동강 난 나라를 합치지 못하는가, 왜 가족친지를 지척에 두고도 오가지 못하는가 하는 비감한 마음에 숙연해진다.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게 되고 최재형 선생을 생각한다. 인류의 시원이라는 바이칼이 눈앞에 다가서고 뜬금없이 보드카에 캐비어가 생각나기도 한다. 마음이 살찌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이 책 하나로 행복하다.

언제부터인가는 모른다. 막연하지만 바이칼에 가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꿈은 더욱 강렬해진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그 명징한 칼바람 속에 인류의 시원을 보고 싶다는 꿈을 올겨울엔 반드시 이루어야겠다. 바이칼은 왠지 겨울이어야 할 것 같은 것이다. 바이칼에 가리라는 나의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 불고 추워지는 산막에서 나는 오늘도 바이칼을 꿈꾼다. 갓 베어낸 참나무 한 덩이를 이글거리는 난로 속에 밀어 넣고, 겉이 타고 속이 마르고 그리고 나서야 불덩이 되는 나무를 지켜본다. 사람 또한 같으리라. 스스로 불타는 불덩이가 되기 위해선 겉이 타고 속이 마르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리라.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그래야 겨울이고 그래야 사람 아니겠나. 겨울밤은 깊어가고 나는 다시 바이칼을 꿈꾼다.

책 『매혹과 슬픔-내 영혼의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까지의 문학과 역사를 넘나드는 기록을 보며 나는 바이칼을 꿈꾼다. [사진 권대욱]

책 『매혹과 슬픔-내 영혼의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까지의 문학과 역사를 넘나드는 기록을 보며 나는 바이칼을 꿈꾼다. [사진 권대욱]

잠을 잘 못 주무시는 분이 많음을 알고 있다. 그 고통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늘 불면증에 시달리셨고 그 때문에 천수를 다 하시지 못했다. 잠이 보약이요, 수면 총량 불변이라 하더라도 숙면은 정말 중요하다. 장작 타는 소리와 빗소리, 새소리, 물소리가 잠을 부르는 소리라 하여 산막의 온갖 소리를 모아봤다. 무려 2시간 10분이나 되는 영상의 소리를 줄이고 늘이고 붙이고 감추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잠자리에서, 명상의 자리에서 그냥 틀어놓고 꼭 사용해 보기 바란다.

삶은 생각처럼 무겁지 않다. 무슨 일로 불편하든 마음이 또 무슨 일로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무얼 잃어버렸다거나, 무얼 해야 하는데 귀찮다거나, 잘 안되던 단배공이 제법 된다든가, 오늘 부를 좋은 노래가 생각났다던가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니 어찌 우리네 삶을 무겁다 할 것인가. 삶은 생각처럼 그렇게 무겁거나 심오하지 않다. 외로움 또한 같다. 외로움,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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