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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 민주주의, 위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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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18년 중국에서 열린 학술회의 때 일이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필자의 발언이 끝나자 한 중국 정치학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요인즉슨, 왜 한국에는 임기를 제대로 마치고 성공하는 최고 지도자가 없냐는 것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파면뿐 아니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결말까지 언급하며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식의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한편으로 불쾌했지만 다른 한편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고민하며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정치권의 노력과 함께 #시민사회의 역할도 있어야 #깨어있는 시민의 참여가 중요

한국의 시민들은 지도자 개인보다는 민주주의 체제에 더 신뢰를 보낸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과거 권위주의 시절과 같이 강한 정치적 리더가 필요하다고 답하는 응답자는 있겠지만, 그 누구도 현재 민주주의 체제에서 과거 권위주의 체제로 돌아가기 원한다고 답하지 않는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라 부르는데, 민주주의가 ‘유일한 게임의 규칙(only game in town)’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한국 시민들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며, 따라서 다소 급격한 리더십 변화의 와중에서도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올 수 있었다.

필자의 개인 에피소드를 늘어놓은 이유는 현재 논의되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론, 즉 현 정권의 등장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을 따져 보기 위함이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위기의 주요 원인이자 징후라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가령 지난 25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와 직무 정지를 명령하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친문 586 운동권 독재’로 인하여 법치와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 무너졌으며, ‘진보언론과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은 정권과 이익을 공유하는 어용으로 전락했고, 정권의 맹목적 지지자들인 ‘문빠’로 인해 현 정권이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독재 정권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지난 6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가 발간하는 〈한국정치연구〉에 실린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논문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위기와 대안’은 보다 체계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현 정권이 초래한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화는 강화됐고, 법의 지배는 위험에 놓였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은 위로부터 국가에 통합되면서 사회적 다원화와 정당의 발전에 부정적인 힘으로 등장했다”라고 요약한다. 시민사회의 책임 부분에 대해 ‘시민단체가 권력기관화되었고, 국가권력과 시민사회(운동)의 호혜적 결합으로 공론장이 소멸하였으며, ‘빠’ 운동의 집단적 공격성과 맞물리며 공론장 황폐화와 ‘동원된 다수의 전제정’ 현상이 나타났다’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전면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정치적 극단주의와 양극화, 정당을 우회하는 ‘청와대 정부’와 ‘캠프 정부’ 등 여러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다. 운동권 출신 정권의 미숙한 집단 사고(group think)와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 포섭의 위험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다만, 트럼피즘(Trumpism)으로 불리는 미국 정치의 위기 상황과 비교했을 때, 과연 한국의 정치 상황이 위기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는지 독재와 다수의 전제정으로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필자가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은 위기론에 담겨 있는 한국 시민사회에 대한 부정적·회의적 시각이다. 시민단체의 권력화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현 정권 들어 더욱 심각해졌다고 보기도 힘들다. 시민단체의 영향력과 위상은 2000년 총선 낙천낙선 운동 이후 계속 약화해왔다. 또한, 한국 시민사회의 생태계는 전통적인 시민단체를 넘어 촛불집회로 대표되는 사회운동, 온·오프라인으로 활동하는 이슈 조직, 풀뿌리 지역 조직 등으로 더욱 다양화·다원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제대로 된 논의를 위해서는 국가에 포섭되어 권력화된 시민단체와 극단적인 ‘빠’ 현상만으로 포착될 수 없는 시민사회의 복합·다면적이고 동태적인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다음으로 조직화하지 않은 일반 시민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최장집 교수의 위기론에는 ‘아노미적 시민’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정치의 장에서 소외되어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무기력한 일반 시민의 모습을 그리는 듯하다.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높은 시민 의식으로 코로나19 방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한편 역대 최고 투표율로 선거에 참여한 능동적 시민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K-방역의 신화에 현혹되어 투표장으로 동원된 ‘아노미적 시민’일까, 아니면 비판적 의식과 효능감으로 참여한 ‘깨어있는 시민’의 상에 가까울까.

여하튼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정권의 각성, 제도권의 정치개혁, 정당정치의 복원. 다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추동해온 시민사회의 역할과 잠재력에도 주목하자.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