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형님" 영화 속 조폭은 없었다…칠성파 후계자의 '조용한 출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칠성파의 '원조 두목'으로 불린 이강환씨가 2010년 4월 6일 휠체어를 탄 채 부산 연제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칠성파의 '원조 두목'으로 불린 이강환씨가 2010년 4월 6일 휠체어를 탄 채 부산 연제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26일 오전 5시 강원도 원주교도소 철창문이 열리면서 칠성파 후계자인 A(52)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2013년 범죄단체조직죄로 붙잡힌 이후 7년 만의 출소였다. 40여명이 A씨를 마중 나왔지만, 영화에서처럼 검은색 차량이 도열하고 조직원들이 큰절을 하는 등 세 과시를 하는 모습은 없었다. 마중 나온 40여명 대부분은 A씨의 친구이거나 지인으로, 칠성파 조직원은 수 명에 불과한 것으로 경찰은 파악했다.

칠성파 후계자 A(52)씨 26일 오전 5시 원주교도소 출소 #경찰 "A씨 지인 40여명 모였지만 칠성파 조직원은 수명 불과" #경찰 “여느 출소자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출소…해운대로 이동”

 철창문을 나선 A씨는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지인들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뒤 곧바로 친구가 운전하는 차량 뒷좌석에 탑승했다. 곧장 부산으로 내달린 차량은 이날 오전 9시쯤 부산 해운대의 한 온천장 앞에 멈췄다. A씨는 온천장 이용 후 간단히 아침 식사를 먹고 집으로 귀가했다. 원주교도소에서부터 부산 해운대까지 동행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부산지방경찰청과 부산 서부경찰서 폭력계 15명은 이날 오전 10시 경찰청으로 복귀했다.

 부산경찰청 권유현 폭력계장은 “영화에서처럼 깍두기 머리를 한 조직원 수십 명이 출소한 두목에게 ‘형님’ 하고 외치며 90도로 인사하거나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던 건 이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라며 “여느 출소자와 다름없이 평범하고 조용하게 원주교도소를 떠났다”고 말했다.

영화 `친구`의 주인공이었던 조직폭력배 준석(유오성 분)의 모델로 알려진 폭력조직 칠성파의 전 행동대장의 결혼식이 열렸던 2007년 부산의 한 호텔 정문 모습. 경찰은 이날 결혼식에 부산지역 폭력조직은 물론 전국의 조폭들이 대거 참석할 것에 대비 식장 주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도열이나 집단인사 등 시민들에게 불안을 조성하는 행위 등을 자제시켰다. 중앙포토

영화 `친구`의 주인공이었던 조직폭력배 준석(유오성 분)의 모델로 알려진 폭력조직 칠성파의 전 행동대장의 결혼식이 열렸던 2007년 부산의 한 호텔 정문 모습. 경찰은 이날 결혼식에 부산지역 폭력조직은 물론 전국의 조폭들이 대거 참석할 것에 대비 식장 주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도열이나 집단인사 등 시민들에게 불안을 조성하는 행위 등을 자제시켰다. 중앙포토

 15년 전만 해도 칠성파는 부산의 최대 폭력조직이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을 주 근거지로 탄생한 칠성파는 보스 이강환(79)씨의 손위 동서가 1957년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제 호황에 편승해 유흥·향락업소, 오락실 등에서 거둬들인 수입원을 바탕으로 칠성파는 전국 최대 규모로 세를 불렸다.

 1990년대에는 20세기파, 영도파, 유태파 등 반(反)칠성파 세력과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 1993년 7월 라이벌 조직인 신20세기파가 세력을 확장하자 간부급 조직원 김모(당시 26살)씨를 중구 보수동 길거리에서 흉기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이후 영화 ‘친구’의 소재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친구`촬영현장. 유오성, 장동건. 중앙포토

영화 `친구`촬영현장. 유오성, 장동건. 중앙포토

 그러다 2006년 부산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영락공원 장례식장 난동 사건’ 이후로 칠성파와 20세기파 모두 급격히 와해하기 시작했다. 조직폭력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검찰은 2010년 이강환씨를 검거한 데 이어 2013년에는 A씨마저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핵심인물 검거 이후 칠성파 조직원들은 용역업체에 취업하거나 도박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돈벌이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칠성파는 2016년 촛불 집회 이후 사실상 와해 단계가 됐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으로 도심에서 조폭이 난동을 부렸다 하면 곧바로 신원이 노출돼 버린다”며 “조폭들 스스로 몸을 사리게 된 데다 시민의식이 높아져 조폭에게 피해를 당하면 곧바로 신고하기 때문에 조폭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졌다”고 말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조폭의 시대’ 쇠락을 더 앞당기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유흥업소, 오락실 등의 영업이익이 급감하면서 조폭들의 돈벌이 대상이 사라졌다”며 “이합집산했던 조폭들이 돈이 떨어지자 조직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손목까지 문신한 조폭[연합뉴스] 오른쪽은 부산지방경찰청[사진 다음 로드뷰]

손목까지 문신한 조폭[연합뉴스] 오른쪽은 부산지방경찰청[사진 다음 로드뷰]

 현재 부산경찰청이 관리 중인 칠성파 조직원은 98명에 이른다. 출소한 A씨가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벌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A씨는 경찰청 우범자 관리규칙에 따라 동향관찰 대상자로 분류된다. 관할 경찰서와 지구대는 분기별로 A씨를 관찰하게 된다. 관찰 대상에서 벗어나려면 조직폭력배 일제정비 기간 동안 최소 3년간 범죄가 없었다는 사실이 소명돼야 한다. 부산경찰청 권 계장은 “우범자 관리 규정에 따라 철저히 동향 관리를 할 것”이라며 “부산의 조폭 전성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조직성이 있는 범죄 조짐이 보이면 곧바로 수사에 착수해 엄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