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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서 열린 세기의재판···30년전 살아있는 권력 단죄한 검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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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맞서 싸운 검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살아있는 권력'이자 살인을 마다않는 흉폭한 폭력조직인 마피아에 맞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 마피아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서 기원한 거대하고 뿌리 깊은 조직범죄단이다. 보호비 명목의 돈 뜯기로 시작해 암살·청부살인·마약밀매·밀수·공갈·사기·도박·돈세탁·고리대금·성매매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며 불법 이익을 취하는 조직이다. 일부는 부동산업·숙박업 등 합법적인 사업을 벌이며 세력을 키우기도 한다.

마피아, 정·관·재계 결탁해 활개 #두 검사,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 #707명 기소 476명 유죄 받아내 #유기징역 2165년에 19명 종신형 #단죄 당한 마피아, 보복 폭탄공격 #팔코네·보르셀리노 검사 암살 당해 #시칠리아, 공항에 검사 이름 붙여 #마피아 수사 직후 반부패 수사 시작 #‘마니 풀리테’ 수사로 5000명 기소 #정계 흔들고 집권당 해체 불러와 #검사의 피땀으로 정의 바로 세워

조반니 팔코네 검사(왼쪽)와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 사진=위키피디아

조반니 팔코네 검사(왼쪽)와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 사진=위키피디아

마피아, 이탈리아에서 ‘살아있는 권력’으로

19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통일된 뒤로는 정계·관계·재계와 결탁해 세력을 키워왔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샌프란스시코·라스베이거스 등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이탈리아의 마피아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냉전·종교를 이용하고 권력의 비호까지 받으면서 공권력도 통제하기 어려운 강력한 어둠의 세력으로 성장했다. 마피아는 이탈리아에서 사실상 ‘살아있는 권력’이자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의 정의감은 식지 않았다. 독버섯이 자라는 것은 언제까지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 검사들이 1980년대에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마피아의 본고장인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에서다. 이 지역 검사인 조반니 팔코네(1939~1992년)과 파올로 보르셀리노(1940~1992년)이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친구로 나란히 검사가 됐으며, 서로 의기투합해 마피아를 뿌리 뽑기 위해 나섰다. 이들은 그 전까지 아무도 할 수 없었던,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일을 과감하게 시작했다.

1992년 7월 마피아의 폭탄 공격으로 부숴진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의 차량. [AP=연합뉴스]

1992년 7월 마피아의 폭탄 공격으로 부숴진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의 차량. [AP=연합뉴스]

80년대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마피아 수사 시작

이들은 지역 마피아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고 범죄 혐의가 확인된 조직원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마피아 척결이 시작됐다. 마피아는 권력층 인맥을 동원해 검사들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팔코네와 보르셀리노에게는 외압이 통하지 않았다.
두 검사는 끈질긴 수사를 통해 마피아 조직 내 불만과 균열이라는 빈틈을 파악했다. 이를 이용해 일부 보스를 정보원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이들을 통해 확보한 증거와 증인를 통해 마피아 보스와 조직원들을 대거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아바테 조반니 외 706명’이라는 제목의 기소장과 관련 서류의 분량은 모두 8000쪽이나 됐다. 기소장 제목에서 보듯 기소된 마피아 보스와 조직원은 모두 707명에 이르렀다.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수사한 결과였다.

역사적인 수사에 이어 1986년 2월 10일 팔레르모 지방법원에서 마피아를 단죄하는 세기의 재판이 시작됐다. 이 재판은 수많은 피고인들에 대해 장기간 진행하다는 뜻의 ‘막시 재판(Maxiprocesso)’으로 불렸다.

1992년 7월 마피아의 폭탄 공격으로 부숴진 수사 검사 파올로 보르셀리노의 경호원 차량. 로이터=연합뉴스

1992년 7월 마피아의 폭탄 공격으로 부숴진 수사 검사 파올로 보르셀리노의 경호원 차량. 로이터=연합뉴스

세기의 수사와 재판으로 마피아 단죄

재판은 구치소 안에 특별히 튼튼한 벽으로 건설한 8각형 벙커 형태의 법정에서 이뤄졌다. 미사일 공격에도 끄떡없도록 설계했다. 무장한 마피아가 쳐들어오거나 폭탄으로 벽을 부순 뒤 법정에 난입해 보스와 조직원을 구출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시 대피소를 방불케 하는 이 튼튼한 법정은 마피아를 단죄하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재판은 1992년 1월 30일 이탈리아 대법원에서 종결됐다. 법정은 마피아가 벌인 120건의 살인과 마약밀매, 폭력과 협박에 의한 강요 혐의를 인정했다. 앞서 이탈리아는 마피아를 척결하기 위해 범죄조직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했는데, 체포된 조직원들에겐 이 조항도 처음으로 적용됐다.
재판 결과 기소된 마피아 보스와 조직원 707명 중 476명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이 가운데 1명은 재판 도중 암으로 사망했다. 유기 징역형을 선고 받은 338명이 받은 형량을 합치면 2665년이나 됐다. 이와는 별도로 죄가 무거운 마피아 두목 19명에겐 종신형이 선고됐다. 시칠리아 섬을 무대로 활개 치던 마피아를 가리키는 ‘코사 노스트라’는 마침내 법의 심판을 받았다.

조반니 팔코네 검사. 사진=위키피디아

조반니 팔코네 검사. 사진=위키피디아

마피아 보복 암살로 검사 희생

그러자 마피아는 잔혹한 본성을 드러냈다. 암살로 보복에 나섰다. 추가 수사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1992년 5월 23일 차량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팔코네 검사가 목숨을 잃었다. 마피아가 벌인 암살이었다. 하지만 보르셀로 검사는 겁을 먹기는커녕 더욱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암살로 추가 수사를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검찰은 5명의 경호원을 붙여주면서 보르셀리노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팔코네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그해 7월 19일 보르셀리노도 경호원들과 함께 폭탄 공격을 받고 숨졌다.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 사진=위키피디아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 사진=위키피디아

마피아는 수사 검사만 제거하면 자신을 향한 칼끝이 꺾이거나 무뎌질 것으로 기대했다. 공권력도, 시민들도 겁을 먹고 숨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칠리아 당국과 시민들은 더욱 결연해졌다. 마피아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두 검사의 이름을 팔레르모 국제공항에 붙였다. 팔레르모 국제공항은 ‘팔코네 보르셀리노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마피아 조직원을 포함해 항공편으로 팔레르모를 오가는 모든 사람은 두 검사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공항을 이용해야 했다.

조반니 팔코네 검사와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의 이름을 딴 팔레르모 공항 사이트. 사진=팔레르모 공항 웹사이트 캡처

조반니 팔코네 검사와 파올로 보르셀리노 검사의 이름을 딴 팔레르모 공항 사이트. 사진=팔레르모 공항 웹사이트 캡처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에 검사들 이름 붙여

이탈리아는 공항에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다. 로마 공항에는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베니스에는 『동방견문록』를 구술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 피렌체에는 콜롬부스가 발견한 곳이 인도가 아니고 신대륙임을 밝힌 항해가 아메리고 베스푸치, 피사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면서 정의를 실천하다 범죄의 희생자가 된 검사들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례적이다. 이탈리아인이, 시칠리아 주민이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검사를 명예롭게 기억하는 방법이다.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검사가 불을 당긴 정의의 전쟁은 1992년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반부패 수사로 이어졌다. 시칠리아 마피아에 대한 재판이 끝난 직후인 1992년 2월 17일 밀라노 검찰의 젊은 검사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가 당시 연정에 참여하고 있던 사회당 소속 관리를 700만 리라(약 425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체포했다. ‘깨끗한 손’이라는 뜻의 반부패 수사인 ‘마니 풀리테'(Mani Pulite)’의 시작이다. 마니 풀리테 수사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약 5000명의 정계·관계·재계 인사의 부패 혐의를 들춰냈다. 고위 정치인의 부패 혐의가 속속 드러나면서 전통의 거대 정당인 민주기독당(DC)과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1994년 해산됐다. 상하원 의원의 거의 절반이 기소되면서 더 이상 기존 정당을 유지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피아를 재판한 팔레르모의 막시 재판정. 사진=위키피디아

마피아를 재판한 팔레르모의 막시 재판정. 사진=위키피디아

마피아 수사, 반부패 수사 불 붙여

이탈리아 국회가 마비되고 400개에 가까운 지방 의회가 해산될 정도였다. 12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대대적인 정개 개편이 이뤄졌다. 기득권을 바탕으로 권력과 뇌물을 즐겼던 부채 정치인들은 감옥에 가거나 사라져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 들어선 이탈리아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고 할 정도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마피아 보스 토토가 체포되는 모습. 그는 2017년 11월 17일 감옥에서 숨졌다. AP=연합뉴스

마피아 보스 토토가 체포되는 모습. 그는 2017년 11월 17일 감옥에서 숨졌다. AP=연합뉴스

권력·폭력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여줘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검사가 불을 당긴 범죄와의 전쟁이 이탈리아 정계까지 흔들어놓은 셈이다. 두 검사는 2006년 타임지 선정 ‘지난 60년 가장 위대한 영웅’에 뽑혔다. 2017년 7월에 열린 25주기 추도식에서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은 “마피아는 피할 수 없는 악이 아니라 물리칠 수 있는 범죄 현상임을 보여줬다”며 두 검사 영웅을 추모했다. 두 검사는 권력·폭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는 의미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시칠리아 주지사였던 친형을 마피아에 잃은 유가족이다. 3년 전인 2017년 11월 18일에는 시칠리아 마피아 두목으로 ‘토토 우 쿠르투(키 작은 토토)’ ‘라 벨바(짐승)’ 일 카포 데이 카피(두목 중의 두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살바토레 리나가 감방에서 사망하면서 악의 시대에도 황혼이 깃들기 시작했다. 리나는 두 검사를 비롯한 100~200명의 살해를 지시한 혐의로 1993년 체포됐다.

마피아 보스 토토의 스냅샷. 2017년 11월 17일 감옥에서 숨졌다. AP=연합뉴스

마피아 보스 토토의 스냅샷. 2017년 11월 17일 감옥에서 숨졌다. AP=연합뉴스

마피아가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활개 치던 시칠리아는 두 검사의 피로 정화됐다. 이들이 울리기 시작한 정의의 종은 이탈리아 전체의 반부패 수사로 번져 반칙과 특권으로 얼룩진 이탈리아를 청소하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에서 반부패 수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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