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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코로나 재난’ 여성들의 극단선택 막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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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장은진 한국심리학회 회장, 한국침례신학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장은진 한국심리학회 회장, 한국침례신학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8월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잃은 여성이 전년보다 2%가량 늘었다. 특히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많이 증가한 것으로 관련 학회에서 보고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 와중에 여성이 더 심각한 위기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정 불화와 폭력 증가 위험 수준 #효과적 도움 줄 심리서비스 시급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을 여성의 생물학적 취약성으로 설명한다. 여성은 호르몬의 영향으로 감정 기복이 크고 극단적 선택 충동을 더 많이 느껴 재난에 더 영향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고통을 개인의 취약성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에 따르면 개인이 취약성을 갖고 있더라도 환경적 요인의 작용에 따라 심리적 고통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환경적 요인이 취약성을 보호하기도 하고 악화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여성이 처한 사회적 환경은 취약성을 보호하고 고통을 완화하기는커녕 그 반대에 가깝다. 공적 돌봄이 멈춘 자리는 여성들의 ‘독박 육아’로 메워진다.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가정 불화와 가정 폭력의 위험성도 커졌다.

경제적 충격에 따라 고용 안정성이 낮은 직업부터 실직사태를 겪는 와중에 여성이 먼저 감원과 감봉 대상이 되면서 더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듯 코로나 장기화로 여성이 생활 환경 속에서 경험하는 심리·사회적 스트레스가 많이 증가했고, 여성들의 안전이 더 위태로워졌다.

심리적 위기에 대처하는 정신건강 시스템이 미비한 현실도 심리적 고통을 악화시키는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2013년 OECD는 당시에도 자살률 1위였던 한국 정부에 모든 국민의 정신건강 증진 방안을 권고했다. 정신건강이 악화한 이후에야 개입하지 말고 비교적 가벼운 심리적 문제를 겪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선제적으로 체계적인 심리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OECD 권고는 실현되지 못했고 지난 7년간 국민을 위한 심리 서비스 개선은 미미했다. 단적으로 국가 정신건강 체계에서 활동하는 전문 심리사 수는 인구 10만 명당 2명 이하로, OECD 평균(26명)보다 턱없이 적다. 사회구성원이 경험하는 심리·사회적 위기의 해결은 상당 부분 개개인의 몫으로 전가되고 있다. 국민의 정신건강 지표들이 호전되지 못한 상황에서 코로나 악재까지 겹쳤다.

이제라도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심리 서비스 지원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심리적 고통이 개개인의 문제나 병리적 상태만이 아니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리적 고통의 문제를 개인의 나약함이나 과민함으로 치부한다면 사람들은 고통을 숨기고 더 고립될 것이다.

또한 국민이 언제든지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알아보고 필요하다면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처럼 생활 속에서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심리서비스 기관을 확충해야 한다. 다른 OECD 국가처럼 ‘국가 전문 자격 심리사’(Licensed Psychologist) 제도 도입과 정책적 활용도 강력히 권고한다. 전공 교육과 훈련을 거친 심리전문가들이 서비스를 제공할 때 국민이 안전하고 효과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위기는 가정에서 가장 약한 구성원을 통해 드러난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심각한 고통을 호소한다면 이는 그 구성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위기를 반영한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정신건강의 위기는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건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위험신호다.

위태롭게 점멸하는 신호등 앞에서 이제 국가는 여성의 정신건강, 나아가 전체 국민의 정신건강에 대한 책무를 더는 좌시하고 미뤄서는 안 된다.

장은진 한국심리학회 회장·한국침례신학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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