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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는 건축 구조, 돌멩이는 테이블…한 여성 디자이너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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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페리앙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청담동 '10 꼬르소 꼬모' 전경. 사진 '10 꼬르소 꼬모'.

샬롯 페리앙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청담동 '10 꼬르소 꼬모' 전경. 사진 '10 꼬르소 꼬모'.

“좋은 디자인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프랑스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도시 설계자이자 사진가였던 샬롯 페리앙(1903~1999)의 말이다. 그는 당시 남성 중심적이었던 디자인 업계에서 현대 산업 소재를 수용하고 전통적인 장식 규범을 거부하는 등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며 20세기 디자인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12월 13일까지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운영하는 서울 청담동의 패션 편집 스토어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서 샬롯 페리앙의 ‘포토그래퍼 앤 디자이너’ 전시가 열린다. 페리앙의 대표작인 책장 ‘뉘아주’, 의자 ‘LC7’ ‘도쿄 셰즈 롱그’ 등 카시나 가구 15점과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 38점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 1930년대 파리 여학생 기숙사를 위해 만든 테이블. 좁은 기숙사 방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 1930년대 파리 여학생 기숙사를 위해 만든 테이블. 좁은 기숙사 방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밀라노 기반의 사진 전시 에이전시 ‘아드미라’의 큐레이터이자 이번 전시 기획자 중 한 명인 엔리카 비가노는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샬롯 페리앙은 전문적인 사진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며 “자연의 평범한 사물을 보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다.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페리앙은 뛰어난 가구 디자이너였던 동시에 지칠 줄 모르는 산악인이었고 독립적인 여행가였다. 휴일이면 알프스를 오르고, 유럽은 물론 일본·인도까지 여행했던 그는 자신의 주의를 끄는 것이 있으면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 사진으로 기록했다. “몸짓, 화병, 냄비, 조각품, 보석, 삶의 방식이든 세상 모든 존재에는 예술이 담겨 있다”는 게 페리앙의 생각이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은 형태와 색감, 본질과 기능 등 여러 면에서 건축물과 가구 디자인의 영감이 됐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 오른쪽의 의자는 층층의 단면이 겹쳐진 바위 사진처럼 여러 개를 포개서 쌓을 수 있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 오른쪽의 의자는 층층의 단면이 겹쳐진 바위 사진처럼 여러 개를 포개서 쌓을 수 있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 산등성이의 곡선을 닮은 긴 라운지 체어는 눈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반영한 듯 보인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과 가구. 산등성이의 곡선을 닮은 긴 라운지 체어는 눈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반영한 듯 보인다.

비가노는 “그의 사진은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한 시각적인 노트였다. 돌을 촬영한 사진은 티 테이블의 혁신적인 디자인이 됐고, 보트를 촬영한 사진은 심플한 조명의 토대가 됐다”며 “사진과 가구 디자인에서 드러나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번 전시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큐레이팅했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 촬영한 회전목마 사진은 높은 고도의 건축물인 ‘비부악’ 디자인을 연상시키고, 파리의 알록달록한 빌딩 사진은 그의 대표작인 컬러풀한 책장 ‘뉘아주’를 연상시킨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 '크로아티아의 회전목마'. 1937 ⓒ Archives Charlotte Perriand

샬롯 페리앙의 사진 '크로아티아의 회전목마'. 1937 ⓒ Archives Charlotte Perriand

샬롯 페리앙의 사진 '물고기의 척추골'. 1933 ⓒ Archives Charlotte Perriand

샬롯 페리앙의 사진 '물고기의 척추골'. 1933 ⓒ Archives Charlotte Perriand

전시장에는 강렬한 인상의 동물 뼈와 화석 사진도 걸려 있다. 페리앙이 건축물과 가구의 뼈대, 즉 구조물의 기능과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법한 대상이다. 실제로 페리앙은 생전에 자연에서 얻은 사진들을 설명하며 “우리의 배낭은 조약돌, 오래된 신발, 바다의 파도로 자연스레 조각된 나무 등의 보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는 이 보물들을 두고 ‘원생 미술’이라 불렀다”고 말한 바 있다.

샬롯 페리앙의 사진 '접시를 들고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손과 샬롯 페리앙'. 1928 ⓒ Archives Charlotte Perriand

샬롯 페리앙의 사진 '접시를 들고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손과 샬롯 페리앙'. 1928 ⓒ Archives Charlotte Perriand

이번 전시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인간을 위한 건축’으로 유명한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와 샬롯 페리앙의 인연이다. 두 사람은 10년 넘게 협업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함께 디자인했는데 그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 디자이너인 페리앙은 동경했던 르 코르뷔지에를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청했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여기는 자수를 놓는 데가 아니다”라며 거절한다. 얼마 후 열린 한 미술 페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품이 페리앙의 것임을 알게 된 르 코르뷔지에는 직접 페리앙을 초대해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샬롯 페리앙이 직접 촬영한 40대의 젊은 르 코르뷔지에의 사진도 있다. 20대의 샬롯 페리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접시를 들고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손과 샬롯 페리앙’ 사진은 16살의 나이 차를 뛰어 넘어 멋진 파트너였음을 짐작케 한다.

20세기 현대 디자인계의 거장 샬롯 페리앙(1903~1999) 전시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편집숍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서 12월 3일까지 열린다. 임현동 기자

20세기 현대 디자인계의 거장 샬롯 페리앙(1903~1999) 전시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편집숍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서 12월 3일까지 열린다. 임현동 기자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어려웠던 20~30년대 젊은 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서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한 대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었던 페리앙의 당당함은 전시장 마지막 부분에 걸린 사진에서 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1932년 톱리스 차림으로 설산을 마주한 뒷모습 사진은 그가 시대를 대표하는 창의적인 아티스트이자 독립적인 여성인 동시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음을 단 한 컷으로 정의해놓았다.
비가노는 “샬롯 페리앙은 산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여가와 일을 위해 알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 사진은 그 기쁨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장 와닿는 것은 이 사진에 담긴 자유와 자연과의 연계성”이라며 “페리앙은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진정한 접근방식을 가졌고 그를 둘러싼 설산의 정상은 그와 자연에 대한 연결성을 보여준다. 또 선입견과 사회의 규율로부터 벗어난 몸과 정신, 자유를 상징하는 위로 뻗은 손이 이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샬롯 페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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