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태어나자 버려져 얼어죽을 뻔한 50대 남자

중앙일보

입력 2020.11.25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67)

요즘은 아기를 낳으면 본인보다 그 부모가 열 턱은 내야 할 만큼 축제 분위기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출가한 자식이 아이를 낳아야만 할아버지, 할머니란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사진 pickpik]

요즘은 아기를 낳으면 본인보다 그 부모가 열 턱은 내야 할 만큼 축제 분위기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출가한 자식이 아이를 낳아야만 할아버지, 할머니란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사진 pickpik]

여동생이 할머니 대열에 끼었다. 조카가 실시간 보내오는 천사 같은 아기 사진을 돌려 보며 웃음꽃이 핀다. “언니야, 그래도 난 언니가 첫아기를 낳아 친정 온 날이 가장 기억나. 큰 방에 조그마한 아기를 뉘어 놓고 겨울이불로 철벽같은 담벼락을 만들어 방문 밖에서만 바라보게 했잖아. 마치 손대면 사라지는 보물처럼 호호.” 생각만 해도 우스운 옛날이야기다.

남자는 군대 이야기로, 여자는 아이 낳는 이야기로 밤을 새운다더니 동네 어르신이랑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추억 속의 새댁이 된다. 구순이 넘는 한 어머니는 새댁시절 밭일을 하다가 진통이 오자 남편에게 미역을 좀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다. 남편은 사흘 만에 돌아오면서 빈손으로 들어오더란다. 미역은 안 사 왔느냐고 물으니 내려가다가 노름판에 붙어서 하마나 하마나 하고 화투판에 끼어 돈도 다 잃고 배고파 들어 왔노라고. 그래도 영감이 돌아온 것이 감사해 밥상에 조기 한 마리 얹어 밥상을 차렸다. 미역국을 안 먹어도 영감이 돌아온 것에 더 감사했단다.

또 한 어르신이 바통을 받는다. 오전에 부부가 같이 밭일을 하다가 사르르 배가 아파 집으로 들어가 혼자서 아이 낳았다. 혼자서 물을 데워 가위로 태 자르고 씻어서 이불에 싸 뉘어 놓고, 아픈 몸을 털고 일어나 점심밥을 이고 밭에 나가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남편은 늦게 나타난 부인에게 화를 내며 이고 간 밥 광주리를 엎어버렸다. 흠마야, 내가 읽은 책 속에 장면이랑 너무 똑같아서 대신 이야기를 이었다. “미안해요. 하필 아이가 그때 나와서”라고 말했지요? 하하하, 호호호. 아프고 슬픈 그 역사를 꺼내 모두 배꼽 잡고 웃어 본다.

그때는 농경 사회라 힘든 노동일을 할 수 있는 남자가 특권을 누렸다. 먹을 것이 없으니 제때 밥을 안 먹으면 등가죽이 배에 붙을 만큼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백 년도 채 안 되는 옛날도 아닌 옛날이야기다.

고개 넘어 사는 50대 젊은 남자가 이야기에 낀다. 12남매의 막내인 자신은 태어나자마자 얼어 죽으라고 둘둘 말아 밖에 내놓아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던 사건을 잊지 못한단다. 그래서 지금도 겨울이 가장 싫다고 하며 너스레를 떤다. 부처님이야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는 건 그렇다 쳐도 마치 태어나서 그것을 지켜본 듯 이야기를 하는데 모두 함박 웃으면서도 짠했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리 딸만 낳아 구박받던 엄마가 또 낳은 것이 딸이라 속이 상해 갓 낳은 핏덩이를 둘둘 말아 산에 가서 버렸다. 엉엉 울면서 집에 오니 시어머니가 삼신 할매에게 벌 받는다고 야단을 치며 당장 찾아오라는 말에 터벅터벅 지친 몸을 끌고 버린 곳을 다시 가니 아이가 없어졌다. 하늘이 노래지고 울며불며 찾다가 집에 돌아오니 마당에 키우는 개집에 포대기 자락이 삐죽하게 보였다. 뒤따라오던 개가 아기를 포대기 채로 물고 와 꼭 끌어안고 있더라는 웃픈 이야기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내리 딸만 낳아 구박받던 엄마는 또 낳은 것이 딸이라 속이 상해 갓 낳은 핏덩이를 둘둘 말아 산에 가서 버렸다. [사진 pxfuel]

황석영의 소설에서 내리 딸만 낳아 구박받던 엄마는 또 낳은 것이 딸이라 속이 상해 갓 낳은 핏덩이를 둘둘 말아 산에 가서 버렸다. [사진 pxfuel]

그 힘든 환경에서도 우리를 키워주신 부모가 존경스럽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 어르신은 아무리 힘들어도 한 생명이 잉태되는 것에 순종했다. 옛날에 비하면 상상도 못 할 만큼 편하고 좋아졌지만, 지금은 생명도 돈의 영역이 되어 작은 생명이 태어나 겪어야 할 고난과 힘든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키우기를 주저하며 신이 건네는 손길을 거부하고 지레 포기한다.

조카가 아이를 낳았다는 뉴스에 온 가족 형제가 축전을 보내고 난리다. 요즘은 아기를 낳으면 본인보다 그 부모가 열 턱은 내야 할 만큼 축제 분위기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출가한 자식이 아이를 낳아야만 할아버지, 할머니란 이름을 얻기 때문이다. 창 사이로 보여주는 복숭아같이 보송보송한 아기천사에게 희망과 총기와 온갖 좋은 주문을 버무려 속삭인다. “아가야,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존재란다. 우리가 지켜줄게. 마음껏 누리고 웃고 행복해라. 축하.”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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