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진중권 "가덕도 노무현 공항? 모사꾼·모지리들의 '盧모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가덕도 공항은 내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용이다.” 안철수 대표의 비판에 조국 전 장관은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비난 기꺼이 수용하며 공항명을 지으면 좋겠다. 노무현 국제공항.” 이명박 정권 시절 그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선거철 되니 또 토목공약이 기승을 부린다. 신공항 10조면 고교 무상교육 10년이 가능하며, 4대강 투입 22조면 기초생활 수급자 3년을 먹여 살린다.”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이전 정부땐 신공항 사업을 ‘토목 공약’이라고 비판했던 조국 #유시민도 “잘못하면 활주로에서 고추 말리게 된다”고 비난 #기회이성이 지배하면 절차는 무시, 규칙은 파괴, 법은 넝마가 돼 #원칙이성 떠난 민주당, 소수의 모사꾼·기회주의자 소굴로 변해

21세기 정감록  

이를 지적하자 ‘상황이 달라졌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바뀐 것은 상황이 아니라 정권일 게다. 그가 놓는 수열의 공식은 이것이다. 똑같은 신공항이라도 노무현 정권이 제안하면 찬성,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면 반대, 문재인 정권이 검토하면 찬성. 누가 추진하느냐에 따라 그의 찬반은 달라진다. 그러니 내일 정권이 교체된다면 그의 생각은 다시 바뀔 게다.

그가 발언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트위터를 뒤진다. ‘조만대장경’은 21세기의 정감록.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이미 그 안에 예언되어 있다. 그러자 주역을 인용한다.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온갖 변화에 대응한다.’ 그의 유일한 일관성은 어떤 일에서든 일관성이 없다는 것. 이 일관된 비일관성이 온갖 변화에 대응하는 그의 불변성이다.

이는 그 개인의 특수성이 아니라 민주당 사람들의 보편적 특성이다. 같은 차벽이라도 남이 치면 나쁜 산성, 내가 치면 착한 산성. 봉투도 내가 돌리면 적법하고 남이 돌리면 위법이다. 한때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검사라서 칭송하더니 이제는 검찰총장에게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에게 충성하라고 다그친다.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강준만 교수는 정권의 ‘내로남불’을 헤아리다 지쳐 포기했다고 한다. 이 일관된 비일관성은 그들이 우리와는 뇌 자체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남다른 두뇌회로를 다른 곳에서 ‘기회이성’이라 부른 바 있다. 이는 보편성·일관성을 가진 ‘원칙이성’의 맞짝을 이루는 것으로, 좋게 말하면 임기응변 능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를 가리킨다.

원칙이성과 기회이성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원칙이성의 소유자들은 개별 사안에 객관적·보편적·추상적 기준을 적용한다. 그들은 원리와 규칙을 모든 경우에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문제의 보편적 해결을 꾀한다. 반면, 기회이성의 소유자에게는 이런 보편적 원칙이 없다. 그들은 매사를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처리하며, 그 처리방식을 다른 사안들에까지 적용할 보편적 원칙으로 가다듬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자유주의는 원칙이성 위에 서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며, 규칙에서 예외는 없으며, 남을 향한 비판은 자기에게도 적용돼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 전체주의자들은 대개 기회이성에 따라 행동한다. 그들은 모든 상황을 보편적 원칙을 적용할 수 없는 예외상태, 비상사태로 간주하여 매사를 제 편할 대로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이 기회이성의 주창자였다. “언제가 비상(예외)사태인지 규정하는 자, 그자가 주권자다.”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지금이 비상’이라고 선언하는 그자에게 있다. 툭하면 긴급조치를 발령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던 유신정권. 그 시절 주권은 국민이 아니라 급하면 ‘지금이 비상’이라 선언했던 박정희에게 있었다.

요즘 비슷한 장면을 본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 쿠데타’를 진압한다며 툭하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다. 예외가 아예 규칙이 됐다. 전직 장관은 검찰총장에게 ‘국민의 검찰’이 되지 말고 그 이전에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에게’ 충성하라 다그친다. 권력의 근원이 국민이라는 헌법 정신을 부정한 것이다. 그럼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에게 충성했던 우병우는 왜 비난했는가?

‘법의 지배’에서 ‘법에 의한 지배’로

민주당은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한다며 필리버스터까지 했다. 하지만 집권한 후에 테러방지법의 폐기에 서명한 의원은 고작 5~6명. 심지어 한 의원은 거기에 코로나까지 얹어 수정안을 발의했다. 이는 그동안 민주당에서 해온 자유주의적 언행이 어떤 보편적 원칙의 실천이 아니라 그저 상황의 유불리의 계산에서 나온 전술적 기동에 불과했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통해서 실현된다.”(윤석열 검찰총장) 여기에는 법 앞에 누구도 예외는 없다는 원칙이성이 표명되어 있다. 반면, 기회이성으로 사유하는 전체주의자들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좋아한다. 그 극단적인 예가 바로 추미애 장관의 ‘한동훈 방지법’. 단 한 명을 잡으려고 법으로 전 국민의 비밀번호 해제를 강제하려는 것이다.

사실 민주당을 주도하는 586들은 자유민주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그동안 그들이 자유와 인권을 외친 것은, 진심으로 그 가치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들이 효과적인 투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로 여긴다. 후안 린츠의 말대로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이들처럼 “스스로 민주주의자로서 투쟁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이다.

기회이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차는 무시되고, 규칙은 파괴되고, 법은 넝마가 된다. 추미애 장관이 괜히 폭주하는 게 아니다. 행동의 보편적 원칙이 없으니 그때그때 애드리브를 치며 상황을 물리적으로 돌파할 수밖에. 그의 영혼은 아마 개그맨 김영만의 심정일 게다. “누가 나 좀 말려줘요!” 그거, 대통령도 못 말린다. 그 역시 원칙이성의 소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 노무현을 모독하는가

기회이성의 자의적 통치는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수자원공사에서 4대강 사업 관련 문서를 몰래 폐기하려 했을 때 그들은 사장은 수사 의뢰, 기관은 기관경고, 관련자들에게는 중징계를 지시했다. 월성1호기를 놓고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이번엔 “국민의 명령”이라며 감사조차 하지 말란다. 심지어 감사원과 검찰을 향해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다.

신공항도 마찬가지. 조국 전 장관은 신공항을 “토목공약”이라 비난했었다. 유시민씨도 방송에 나와 “공항은 필요 없다. 잘못하면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리게 된다”고 했다. 그들에게 원칙이성이 있다면 4년 전 소신대로 곳곳에 이 노골적 후견주의(clientelism)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말을 바꿨고, 한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조 전 장관은 신공항에 아예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다. 몇 년 전 녹색당의 김수민 시의원이 현 박정희 체육관을 구미시민체육관으로 개명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이를 트위터로 리트윗하며 적극 격려한 바 있다. 체육관에서 전직 대통령 이름을 빼자더니 지금은 공항에 전직 대통령 이름을 붙이잔다. 그의 기회이성이 다시 한번 빛난다.

노 전 대통령이 총선용 토목공약에 찬성했을 것같지는 않다. 그는 원칙이성의 소유자.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던 그는 후견주의의 강렬한 반대자였다. 2003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총선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개입했던 정부나 대통령이 지금까지 성공한 일이 없다. 특별한 정책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기회주의자들의 나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곧 민주당 안에서 원칙이성의 죽음을 의미한다. 금태섭 전 의원의 탈당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원칙이성이 떠난 민주당은 기회이성으로 무장한 소수의 모사꾼과 아무 생각 없는 ‘모지리들’(바보의 방언)과 그 틈에서 기회만 노리는 기회주의자들의 소굴로 변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잔머리로 일거에 선거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노무현은 그들처럼 살지 않았다. 그는 당선이 보장된 종로를 버리고 홀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자신의 원칙을 위해 예정된 패배를 감수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 부른다. 그는 원칙이성의 화신. 민주당에 득실거리는 기회이성의 소유자들과는 애초에 종자가 다르다. 그 기회주의자들이 노무현의 이름을 판다.

신공항을 어디에 짓든 원칙과 절차는 지켜야 한다. 벌써 기회이성들의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타당성 예비조사를 면제한단다. 그가 반대했을 사업에 그의 이름을 파는 것은 그를 모독하는 일. 노무현을 기리고 싶은가? 그럼 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일 게 아니라 사업의 시행과정에 그가 대변했던 원칙이성을 관철시킬 일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