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창하오·구리·커제…‘한국 킬러’ 키운 녜웨이핑

중앙일보

입력 2020.11.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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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커제는 7세 때 지방에서 올라와 베이징의 녜웨이핑 도장에 들어갔다. 녜웨이핑 9단은 커제 9단이 한국의 신진서 9단을 꺾고 삼성화재배 우승컵을 차지하자 “커제의 다음 목표는 18번, 28번 우승”이라고 말했다. 커제는 삼성화재배 우승과 함께 메이저 세계대회를 8번 우승했는데 이것은 구리 9단이 세운 중국 최고 기록과 같다. 그렇다면 18번 우승은 무슨 의미일까. 이창호 9단은 속기대회 등을 제외한 메이저 세계대회서 17번 우승했다. 녜웨이핑은 이창호의 기록도 넘어서서 명실상부 세계 최고가 되라고 말한 것이다.

조훈현에게 져 추락한 중국 영웅
이창호 기록 넘으라고 커제 격려

녜웨이핑은 사업가로 성공했다. 베이징에 ‘녜웨이핑 바둑도장’을 세운 것이 1999년인데 어느덧 전국에 50개의 지점을 두게 되었고 원생은 1만명에 달한다. 웬만한 학교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세계 최고가 되기 직전 패퇴했으며 승부사로서의 인생은 그 순간 막이 내렸다. 하지만 녜웨이핑은 창하오, 구리를 차례로 키워내 세계 최고에 도전했고 커제에 이르러 드디어 그 꿈을 이루려 하고 있다.

녜웨이핑은 독특하다. 심장이 약한데도 점심때 독한 백주를 한 병씩 마셨다. 두 번 이혼했고 세 번 결혼했다. 언제던가. 양회(兩會)의 일원이 되어 전국인민대회에 참여했는데 그게 무척 자랑스러웠던지 회의 때 달던 빨간 명찰을 밖에서도 계속 달고 있었다. 그는 권력을 즐겼다.

녜웨이핑의 바둑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제1막은 문화혁명이다. 스승은 조리돌림 끝에 죽음을 맞았고 녜웨이핑은 만주의 돼지농장으로 쫓겨갔다. 정치권력의 유탄을 맞은 고통의 시기다. 제2막은 화려하다. 중일슈퍼리그에서 연전연승하며 ‘철의 수문장’이란 별명을 얻었고 정부로부터 ‘기성’ 칭호도 받는다. 바둑 종주국의 위상을 되찾아 줄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제3막은 좌절이다. 아니 절망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제1회 응씨배 결승전에서 한국의 조훈현 9단에게 패배한다. 영웅이 추락했다. 절대권력자 덩샤오핑의 총애와 ‘녜웨이핑은 불패’라는 대륙 인민들의 굳센 믿음이 오히려 납덩이처럼 그를 짓눌렀다. 이후 녜웨이핑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는 끝내 세계대회 무관으로 선수생활을 끝냈다. 37세 동갑내기 조훈현 9단이 이후에도 8번이나 더 우승한 것과는 큰 차이였다.

중국 내에서도 녜웨이핑은 마샤오춘에게 꺾였다. 마샤오춘 9단은 1995년 중국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자가 된다. 그는 녜웨이핑을 “세계대회서 우승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네웨이핑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다.

제4막은 ‘끝없는 도전’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녜웨이핑은 창하오라는 제자를 키웠다. ‘6소룡’이라 이름 붙은 신예 그룹과 선두에 선 창하오 9단을 향한 대륙의 기대는 뜨거웠다. 하지만 창하오 역시 이창호의 철벽에 가로막혀 연전연패하고 말았다.

다음 제자인 구리 9단은 좀 더 강력했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메이저 세계대회 8회 우승이란 금자탑을 이뤘다. 그러나 구리는 이세돌과의 10번기에서 완패했다. 세계대회 우승 횟수에서도 이세돌은 14회로 구리보다 크게 앞선다.

커제가 바로 이 시점에서 등장했다. 한때 녜웨이핑 도장의 꼴찌였던 커제가 빠른 속도로 세계 최고를 향해 질주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잠복(潛伏)’이란 ID로 온라인에서 매년 1000판 이상을 두었다. 온라인에서 한국기사와의 대국을 고집한 이유를 묻자 “한국을 이기고 최고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점은 녜웨이핑의 평생 소망과 똑같다.

세계 최고를 향한 커제와 신진서의 대결은 그래서 더욱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신진서는 커제의 표현대로 “가장 강력한 뒷물결”이자 한국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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