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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게임 ‘일랜시아’는 왜 버려졌을까, 그 미스터리를 쫓는 다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운영진조차 버린 게임” “게임판 고려장”…. 롤플레잉게임(RPG) 명가 넥슨의 클래식 게임 ‘일랜시아’를 시중에서 일컫는 말들이다.

2030 게임 잔존세력의 답답한 현실 #박윤진 감독 장편 데뷔작으로 추적

1999년 국내 최초 레벨 없는 RPG를 표방하며 출시돼 마법 세계에서 어떤 캐릭터든 키울 수 있는 높은 자유도로 초창기 국내 최다 이용자 수를 기록했지만 상업적 게임과 3D 게임 물결 속에 구박대기가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게임을 떠나지 못하는 이용자들이 있다.

박윤진

박윤진

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바로 일랜시아 18년차 ‘고인물’(한 게임을 오래 한 이용자)을 자처하는 박윤진(28) 감독이 그 이유를 찾아 나선 장편 데뷔작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게임을 하며 만든 캐릭터 이름이 바로 ‘내언니전지현’. 그를 최근 서울 마포구 카페에서 만났다.

7년째 동고동락해온 게임 속 공동체(길드) ‘마님은돌쇠만쌀줘’ 구성원들을 주로 인터뷰한 내용이지만, 올 5월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첫 공개될 때부터 화제가 돼 정동진독립영화제 관객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특별상, 춘천영화제 과학창의재단 관객상 등을 휩쓸었다.

“처음엔 이걸 누가 볼까 싶었는데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처음 초청됐을 때 두 번 상영이 다 매진돼서 지인들이 오히려 못 봤어요. 찬란하게 빛나는 유명 인기 게임이 아니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게임이죠. 그래도 저한테 게임은 ‘일랜시아’거든요. ”

다큐 속 일랜시아 게임 장면. 가운데가 박윤진 감독의 게임 캐릭터다. [사진 호우주의보]

다큐 속 일랜시아 게임 장면. 가운데가 박윤진 감독의 게임 캐릭터다. [사진 호우주의보]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찍게 됐나.
“처음에는 그냥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신기해서였다. 일랜시아 추억 다큐가 되지 않을까, 가볍게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추억 때문에 남아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매크로(캐릭터가 특정 행위를 자동 반복하도록 만드는 불법 프로그램)가 주는 충족감이 좋다’ ‘예전에 해보지 못한 걸 할 수 있다’고 얘기하더라. 2년간 열다섯 명 정도를 만났고 영화 방향이 바뀌면서 RPG에 대한 논문도 읽었다. 책임감이 생겼고 깊이 파 보고 싶었다.”
본인은 왜 일랜시아를 하나.
“초등학교 때 남동생이 소개했다. 학교 학원을 오가는 생활인데 게임 안에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 커선 일랜시아를 처음 하던 시절을 느끼려고 접속한다. 어렸을때 생각과 달리 사실 노력만큼 성취하기가 어렵다. 게임 안에선 뭐든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현실에서도) 다시 걱정 없이 해나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반응은.
“‘하루히로’(게임 아이디)님은 단호하게 자신은 추억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매크로 루트를 탄다더라. 정해진 루트대로 해야 완벽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아, 이래서 사람들이 매크로를 돌리나? 정해진 루트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다는 말처럼 생각되기도 해 기억에 남았다.”

자칭 게임 ‘잔존세력’들의 사연엔 이런 20~30대의 답답한 현실도 겹쳐진다. 현실에 없는 성취감을 대리만족하는 취업준비생, 경쟁을 벗어난 가상공간에서 평등하게 만난 친구들과 어떤 사회 인맥보다 끈끈함을 느끼는 이도 있다. 박 감독은 일랜시아가 주는 이런 위안을 게임의 세계관에서도 짚었다.

영화제를 통한 입소문은 넥슨 본사마저 움직였다. 넥슨측이 직접 박 감독을 찾아왔다. 지난 6월 12년만의 첫 게임 이벤트가 열렸고, 7월엔 운영진과 이용자간 사상 첫 간담회까지 마련됐다. 이번 개봉판엔 이런 과정도 담겼다.

박 감독은 “저는 게임에서 사람도, 성취감도 얻었다”며 “제 주변 또래들이 ‘지금 나는 망했어. 옛날에 행복했지’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각자 뭔가 더 능동적인 삶을 찾아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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