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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며느라기’ 구차한 ‘산후조리원’…일상의 성차별, 주류 문화코드로 떴다

중앙일보

입력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쌍둥이 출산 경험을 토대로 여왕벌이 된 사랑이 엄마(박하선). [사진 tvN]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쌍둥이 출산 경험을 토대로 여왕벌이 된 사랑이 엄마(박하선). [사진 tvN]

오로지 젖을 위해 먹고 마시고 운동하는 반인반모(半人半母)의 삶. tvN 월화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그려지는 최고급 산후조리원의 세계다. 수유와 유축으로 일과를 보내는 산모들에게 젖이 많다는 것은 곧 모성을 뜻하고, 일등칸과 꼬리칸으로 나뉘는 절대기준이기 때문이다. 극 중 대기업 최연소 상무에서 최고령 산모가 되어버린 오현진(엄지원)은 자신의 이름과 직업 대신 오직 아이의 태명과 성별, 출산경험 여부, 어느 병원 출신인지만을 묻는 세상에서 좌절감과 굴욕감을 동시에 경험한다.

오로지 젖을 위해 굴러가는 산모의 세계 #‘SNL’ 여성 제작진 뭉쳐 실감나게 그려내 #가사노동부터 낙태죄 다룬 웹툰도 인기 #‘82년생 김지영’ 이후 화두 된 일상 불평등

'산후조리원' 작가 “내가 느낀 울분을 담은 이야기”

‘산후조리원’ 딱풀이 엄마(엄지원). 자신이 주인공이지만 즐길 수 없는 파티를 묘사한 모습. [사진 tvN]

‘산후조리원’ 딱풀이 엄마(엄지원). 자신이 주인공이지만 즐길 수 없는 파티를 묘사한 모습. [사진 tvN]

이는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지만, 경험자에게는 익숙하되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다. “임신은 고달프고 출산은 잔인하고 회복의 과정은 구차하다”는 대사처럼 곱씹기 싫은 기억의 비중도 큰 탓이다. 3년 전 출산한 김지수 작가 역시 “당시 제가 느낀 울분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김 작가와 ‘SNL 코리아’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 합을 맞춘 박수원 PD는 “오랜만에 만나 근황 얘기를 하던 중 험난했던 출산 및 산후조리의‘멘붕’ 스토리를 들으며 다이나믹한 공간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예능 출신 제작진이 뭉친 만큼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웃픈’ 현실을 재치있게 풀어낸다. 산모들이 모유파와 분유파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 등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거리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덕분에 시청률은 3~4%대지만 이를 훨씬 웃도는 화제성과 파급력을 자랑한다. 워킹맘인 이지선(35)씨는 “몇 달 만에 복직하느냐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꼬리칸에 탑승하는 기분이었다”며 “모성애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고 나도 엄마가 처음이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는 드라마가 나온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성차별, 너무나 작으면서도 크고 슬프게도 매우 흔한 일”

드라마 ‘며느라기’의 민사린(박하선)이 아가씨에게 메시지를 받는 장면. [사진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의 민사린(박하선)이 아가씨에게 메시지를 받는 장면. [사진 카카오TV]

전날부터 고생해 시어머니 생신날 아침상을 차리는 모습. [사진 카카오TV]

전날부터 고생해 시어머니 생신날 아침상을 차리는 모습. [사진 카카오TV]

21일 공개된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 첫 회도 사흘 만에 조회 수 93만회를 넘기는 등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17년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연재된 수신지 작가 웹툰이 원작이다. ‘산후조리원’에선 전업맘의 롤모델 사랑이 엄마로 분한 박하선이 시댁에서 예쁨받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며느라기(期)’에 빠진 주인공 민사린 역을 맡아 자의반 타의반 ‘가사도우미’ 신세가 되고 만다.

웹툰 ‘며느라기’. 할아버지 제사를 돕는다는 표현에 반박하고 있다. [사진 며느라기 페이스북]

웹툰 ‘며느라기’. 할아버지 제사를 돕는다는 표현에 반박하고 있다. [사진 며느라기 페이스북]

여성이 일상 속에서 겪는 성차별이 주류 대중문화 콘텐트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달 연재를 마친 수신지 작가의 후속작 ‘곤’은 ‘며느라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낙태를 둘러싼 사회의 이중적 잣대를 담아낸다. 수신지 작가는 웹툰 후기에서 “민사린이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고 워킹맘으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무수한 이야기를 상상하다 낙태죄라는 이슈를 마주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립과학원 주도로 낙태 여부를 알 수 있는 IAT(Induced Abortion Test)를 만들어 1939년생부터 2006년생까지 대한민국 여성을 전수 조사해 한 번이라도 낙태를 경험했다면 감옥에 간다는 설정이다. 과거 국가 인구통제정책으로 낙태한 중년 여성,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미혼 여성, 아이를 갖기 위해 시험관 시술을 한 여성 등이 줄줄이 문제가 되고, 아이를 돌봐주던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가 감옥에 가게 되면서 돌봄노동에 공백이 생긴 워킹맘들까지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한 번이라도 낙태를 경험한 여성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는 세상을 그린 웹툰 ‘곤’. [사진 곤 페이스북]

한 번이라도 낙태를 경험한 여성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는 세상을 그린 웹툰 ‘곤’. [사진 곤 페이스북]

2016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영문판이 최근 미국 타임지의 ‘올해 꼭 읽어야 할 책 100’과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100'에 선정되는 등 여성 서사와 페미니즘은 현재 전 세계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타임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많은 젊은 여성이 암묵적으로 강요받아온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이들이 평생에 걸쳐 받아온 성차별은 너무나 작으면서도 크고, 슬프게도 매우 흔한 일”이라고 평했다. 성균관대 사회학과 구정우 교수는 “최초의 여성 장관, 여성 CEO 같은 사회권력층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일상이 변해야 피부로 와 닿는 변화가 더 크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조명되고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는 것의 의미가 크다”며 “최근 사유리가 제기한 비혼모 출산 문제처럼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 서사가 주목받는 현상은 제작 환경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케이블과 종편뿐만 아니라 OTT 등 플랫폼이 다양화되면서 차별화된 소재와 포맷을 찾는 움직임도 보다 활발해졌다”며 “장르물도 거대 담론보다 일상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작품들이 호응을 얻은 것처럼 여성 화자가 많아지면서 그 영역이 보다 넓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산후조리원’은 1회당 60분 안팎의 8부작, ‘며느라기’는 1회당 20분 안팎의 12부작으로 기존 16부작 드라마의 기승전결 구조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공 평론가는 “그동안 로맨스물에서도 남자주인공의 비중이 더 컸다면 요즘은 여자주인공으로 중심축이 옮겨지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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