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도 버렸던 게임 ‘일랜시아’ 18년차 이용자가 답답해서 다큐 찍었죠

중앙일보

입력 2020.11.24 12:11

업데이트 2021.03.01 17:23

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 다큐에 나오는 일랜시아 게임 속 한 장면을 캡처했다. 가운데 "일랜시아 왜 하세요?" 묻는 붉은 머리 캐릭터가 박윤진 감독의 분신인 '내언니전지현'이다. [사진 호우주의보]

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 다큐에 나오는 일랜시아 게임 속 한 장면을 캡처했다. 가운데 "일랜시아 왜 하세요?" 묻는 붉은 머리 캐릭터가 박윤진 감독의 분신인 '내언니전지현'이다. [사진 호우주의보]

“운영진조차 버린 게임” “게임판 고려장” “예전 명성 회복? 절대” “이런 쓰레기 같은 게임이 없다”…. 롤플레잉게임(RPG) 명가 넥슨의 클래식 게임 ‘일랜시아’ 얘기다.
1999년 국내 최초 레벨 없는 RPG를 표방하며 출시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마법 세계에서 어떤 캐릭터든 키울 수 있는 높은 자유도로 초창기 국내 최다 이용자 수를 기록했지만, 경쟁을 부추기는 상업적 게임, 3D 게임 물결 속에 개발사인 넥슨조차 10년 넘게 외면하며 한줌 남은 이용자들조차 ‘망(한)게임’이라 자조하는 구박대기가 됐다. 게임 속 세계는 매크로(캐릭터가 특정 행위를 자동으로 반복하도록 만드는 불법 프로그램)와 해킹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된지 오래. 그럼에도 여전히 떠나지 못한 이용자들은 무슨 사연일까.

운영진도 버린 게임 일랜시아
21년 전 출시 ‘게임판 고려장’
참다못한 유저가 다큐로 찍어
3일 개봉 ‘내언니전지현과 나’

일랜시아 18년차 자칭 '고인물' 감독의 다큐 

무법천지가 된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에 관한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로 데뷔한 박윤진 감독. [사진 호우주의보]

무법천지가 된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에 관한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로 데뷔한 박윤진 감독. [사진 호우주의보]

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바로 일랜시아 18년차 ‘고인물’(한 게임을 오래 해온 이용자)을 자처하는 박윤진(28) 감독이 그 이유를 몸소 찾아 나선 장편 데뷔작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게임을 처음 하며 만든 캐릭터 이름이 바로 ‘내언니전지현’.그가 중앙대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2년 전부터 준비한 다큐다. 16일 서울 마포구 카페에서 만난 그는 게임 이용자가 직접 찍은 다큐는 국내 최초라 자부했다.
주로 7년째 동고동락해온 게임 속 공동체(길드) ‘마님은돌쇠만쌀줘’ 구성원들을 인터뷰한 내용이지만, 올 5월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첫 공개될 때부터 화제가 돼 정동진독립영화제 관객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특별상, 춘천영화제 과학창의재단 관객상 등을 휩쓸었다.
“개봉한다는 게 아직도 좀 얼떨떨해요. 처음엔 이걸 누가 볼까 싶었는데 인디다큐페스티벌에 처음 초청됐을 때 두 번 상영이 다 매진돼서 지인들이 오히려 못 봤어요. 영화를 먼저 본 한 지인은 이렇게 순수하게 뭘 좋아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본다더군요. 찬란하게 빛나는 유명 인기 게임이 아니라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게임이죠. 그래도 저한테 게임은 ‘일랜시아’거든요. 다큐로 말하고자 했던 게 그런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찍게 됐나.  

“처음에는 그냥 이 게임 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찍어보고 싶어서 자주 만나던 친구들을 인터뷰했다. 일랜시아 추억 다큐가 되지 않을까, 가볍게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추억 때문에 남아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매크로가 주는 충족감이 좋다’ ‘예전에 해보지 못한 걸 할 수 있다’고 얘기하더라. 2년간 열다섯 명 정도를 만났고 영화 방향이 바뀌면서 RPG에 대한 논문도 읽었다. 책임감이 생겼고 깊이 파 보고 싶었다.”

본인은 왜 일랜시아를 하나.  

“초등학교 때 남동생이 소개했다. 학교 가고 학원 다니며 내 인생이 대충 빤하게 그려졌었는데 게임 안에서 처음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재밌어서 글도 쓰게 됐다. 커선 일랜시아를 처음 하던 시절을 느끼려고 자꾸 접속하게 된다. 어릴 적엔 큰 불만 없이 주어진 대로 살면 창창한 미래가 열리겠지, 되게 행복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실 노력만큼 성취하기가 어렵다. 게임 안에선 뭐든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현실에서도) 다시 걱정 없이 해나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게임 잔존세력에 겹쳐지는 20~30대 고충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 [사진 호우주의보]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 [사진 호우주의보]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반응은.

“‘하루히로’(이하 다큐 속 모든 인물은 실명 대신 게임 아이디로 소개된다)님을 만났을 때 너무 단호하게 자기는 추억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왜 게임하냐고 하니까 매크로 루트를 탄다더라. 정해진 루트대로 해야 완벽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완벽’이란 단어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매크로를 돌리나? 정해진 루트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다는 말처럼 생각되기도 해서 기억에 남았다.”

자칭 게임 ‘잔존세력’들의 사연엔 이런 20~30대의 답답한 현실도 겹쳐진다. 박 감독의 친동생인 ‘예려’는 “자취방 월세 내려고” 다른 이용자들에게 돈 받고 게임 캐릭터를 키워주는 ‘부주’ 아르바이트를 한다. ‘매송이’는 “이 망할놈의 게임. 이건 족쇄”라면서도 “내가 시간을 쏟을수록 절대적인 결과가 나오는 게임”을 끊지 못한다. 현실에 없는 성취감을 대리만족하는 취업준비생, 경쟁을 벗어난 가상공간에서 평등하게 만난 친구들과 어떤 사회 인맥보다 끈끈함을 느끼는 이도 있다. 박 감독은 일랜시아가 주는 이런 위안을 게임의 세계관에서도 짚었다.

다큐에서 박 감독이 만든 일랜시아 속 길드 '마니은돌쇠만쌀줘' 구성원들이 게임 속 모임을 하고 있다. [사진 호우주의보]

다큐에서 박 감독이 만든 일랜시아 속 길드 '마니은돌쇠만쌀줘' 구성원들이 게임 속 모임을 하고 있다. [사진 호우주의보]

왜 다른 게임이 아닌 일랜시아를 고집하나.  

“다른 게임도 해봤지만 일랜시아에 감탄하는 부분은 진짜 사람 사는 데 같다. 다른 게임은 한번 직업을 정하면 그 길로 쭉 가야하는데 일랜시아는 완전히 극과 극인 직업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일랜시아에서 갈 수 있는 길이 전사‧상인‧모험가 3가지인데, 전사 임무를 깨려면 상인의 요리가 필요하고 상인이 요리하려면 모험가가 낚시한 물고기가 필요하다. 요즘 모바일게임은 접속하면 내가 혼자 깨야 하는 임무가 100개 넘게 쌓여서 은근 ‘솔로 게임’ 같다면 일랜시아는 다 같이 살 수 있게 만들어진 점이 감동적이다.”

후회하기 싫어서 찍은 다큐, 넥슨도 움직였죠 

다큐에선 방치된 게임 오작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넥슨 노조까지 찾아간다.

“좋아하는 게임 속 문제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게임 속 왕을 만나서 될 일이 아니잖아. 넥슨 고객상담실에 문의를 넣었는데 답변조차 받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생긴 지 얼마 안된 넥슨 노조를 알게 됐다. 노조 지회장님을 만나보니 ‘회사에 불만이 없어도 노조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기다린다고 바뀔 게 없다’더라. 우리도 일랜시아가 없어지고 후회하기 전에 뭔가 해야겠다, 싶어 영화제 출품을 더욱 서둘렀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다큐를 통해 박 감독이 만난 정상원 전 넥슨 개발총괄 부사장. [사진 호우주의보]

'내언니전지현과 나' 다큐를 통해 박 감독이 만난 정상원 전 넥슨 개발총괄 부사장. [사진 호우주의보]

영화제를 통한 입소문은 넥슨 본사마저 움직였다. 넥슨측이 직접 박 감독을 찾아오며 일랜시아엔 지난 6월 12년만의 첫 게임 이벤트가 열린 데 이어 7월엔 운영진과 이용자간 사상 첫 간담회까지 마련됐다. 이번 개봉판엔 이런 과정까지 담겼다.
박 감독은 “사실 이 영화로 엄청나게 바뀌진 않았다. 넥슨이 조금씩 관심 가져준 게 유의미한 변화지만 아직은 보여주기 식인 것 같다. 되게 간단한 것도 안 고쳐주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이번 다큐에 대해 “옛날엔 게임이 폭력적이라고 했다면 지금은 시간낭비라는 시선을 더 느낀다. ‘게임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은 마치 돈 되는 일만 해야 된다는 말 같다. 그런 인식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오히려 저는 게임에서 사람도, 성취감도 얻었거든요. 불의를 봐도 회피하는 ‘나만 아니면 돼’ 타입이었는데 게임 속 세계를 들여다보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제가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주도할 수 없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범위 안에서 뭔가를 바꾸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시선을 갖게 됐죠. 제 주변 또래들이 ‘지금 나는 망했어. 옛날에 행복했지’라고 많이 생각하는데 앞으로 각자 뭔가 더 능동적인 삶을 찾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