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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짠순이 복길네 냉장고 들이던 날, 동네 잔치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16)

짠순이 복길네가 모처럼 잔치를 벌였다. 덕분에 동네 총각들이 시끌벅적 막걸리판을 벌인다. 얼마나 좋은 일이 생겼길래 사람들이 모였을까. 바로 오늘 복길네가 냉장고 안착식을 했기 때문이다. 1987년 양촌리의 푹푹 찌던 어느 여름날, 복길네가 마을에서 꼴찌로 냉장고를 들였다. 요즘엔 냉장고가 뭔 대수냐고 하겠지만, 이렇게 잔치라도 해야 냉장고를 탈 없이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냉장고를 귀중한 재산으로 여겼으니 안착식이 꽤 대수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냉장고를 사면 온 동네 소문이 나고 모두 구경을 하러 모이곤 했다. [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냉장고를 사면 온 동네 소문이 나고 모두 구경을 하러 모이곤 했다. [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복길네가 얼마나 짠순이인지 들어나 보자. 이웃 친구들은 예전부터 복길엄마(일용처)한테 냉장고와 세탁기가 여름에 편하다며 하나 장만하라고 얘기했지만, 복길엄마는 얼른 돈 모아서 밭과 논을 사야 한다고 반대했다.

“훨씬 경제적이구, (복길엄마)봐요. 김치를 한번 담그면 일주일 싱겁거든? 그러니깐 버리는 것도 없고, 일손도 안 들고.”
“맞아. 매일 아침 김치 담는 수고, 그야말로 헛수고지 뭐”
“그래. 큰맘 먹고 사버려요, 응?”

이웃들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게 복길엄마를 꼬시지만 만만찮은 복길엄마는 대답한다.

“그럴까 저럴까 나도 생각을 해봤는데, 역시 아니야. 지금 산다고 해봐. 나중에 몇 년 지나면 또 사야 한다며? 그리고 냉장고 사가지고 써보고 좋으면 세탁기 놓고 싶을 거고, 세탁기 사서 써보고 좋으면 또 컬러 텔레비전도 보고 싶을 거고, 전화도 놓고 싶을 거고…. 아휴, 안 돼! 딱 잘라야지. 눈 딱 감고 나면 하나도 안 사도 되는 거야.” 하여간 알아줘야 하는 복길엄마다.

심지어 복길네는 그동안 이웃집 냉장고에 김치를 보관해 두고 같이 쓰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러니 아침에 이웃집에서 늦게 일어나면, 눈치 보느라 말도 못 하고 맡겨둔 김치도 꺼내 가지 못한 일이 다반사. 하물며 일용엄니(복길할머니)는 쉰밥을 씻어서 다시 먹거나 쉰 나물을 먹고 배탈 나기가 일쑤였다. 보다 못해서 일용이가 두 짠순이(일용엄니와 일용처)에게는 비밀로 하고 시장을 나선다.

시장에서 중고 냉장고를 사 오는 일용이. [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시장에서 중고 냉장고를 사 오는 일용이. [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일용이가 큰마음 먹고 냉장고를 샀다는 걸 모르는지 논밭에서 쉬고 있던 동네 어르신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저 녀석, 저기 뒤에 실은 게 냉장고 아니냐?”
“어, 맞다. 냉장고다.”
“허허, 지 논 한 자락 없는 녀석이… 냉장고부터 사들이는구먼, 허허!”

그러자 한 어르신이 무슨 소리냐며 대꾸한다.
“논 없으면 냉장고 쓰지 말라는 법 있냐? 그런 소리 마라.”
“그럼. 편한 세상인데 왜 안 쓰고 살고 싶어.”
“아, 편한 거 좋은 것만 찾다가 외상들 지니깐 하는 소리지!”
“우리 며느리도 김치밖에 넣어놓은 거 없는 냉장고를…. 그 욕심은 또 커서, 집채만 한 것을 들여놓고는 2년을 갚았다는 게 여태도 덜 갚았다더라! 무슨 짓들인지, 원….”

월부로 가전제품을 사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을 걱정하는 어른의 염려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냉장고를 처음 들이는 그 기쁨을 누가 말리겠는가. 난생 처음 냉장고에서 얼음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냉장고 없이 그동안 어떻게 여름을 보냈나 싶었을 것이다.

난생처음 냉장고에서 만들어진 얼음을 보며 일용엄니가 말한다.
“희한한 일이다! 희한한 일이여. 아무리 전기로 얼린다고 그러지만, 시상에 이렇게 금방 얼음이 되냐! 이 복중에 안 그러냐? 애비야!”
“(한껏 웃으며) 그러니까, 냉장고죠. 한 시간 조금 넘었는데 얼었네. 성능이 아주 좋은가 봐 이거.”

난생처음 냉장고에서 만들어진 얼음을 보고 신기해하는 일용엄니.[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난생처음 냉장고에서 만들어진 얼음을 보고 신기해하는 일용엄니.[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기쁜 마음도 잠시 중고 냉장고라서 전기요금이 많이 나올 것 같다는 말에 걱정이 앞선다. 복길엄마가 걱정하며 물어본다.
“그래도 여름 한 철 쓰는 거잖아?”
“어이구. 그건 안 그래요, 형님. 중고는요. 1년 내 약하게라도 전기를 돌려야지 수명이 길대요. 그렇지 않고 켰다 껐다 하면요, 이내 망가진다는데요.”

둘의 대화를 보니 당시에는 냉장고를 여름철에만 쓰는 집도 많았는가 보다. 괜히 짠순이랄까. 밤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에 두 고부는 쉽게 잠도 못 이룬다.
“밤이라 조용해서 그럴 거예요, 어머니. 들어가 주무세요.”
“난 잠도 올 것 같지도 않다. 윙~~ 하는 소리 나면… 이게 다 돈 들어가는 소리 아니냐. 전기 돌아가는 소리. 윙~ 소리가 나면 종이돈 쉬는 소리 같고. 짤짤짤~ 물 흐르는 소리 나면 동 전세는 소리 같고. 그 소리가 나는 거 계산하다 보니까는 걱정돼 잠이 오냐?!”
“저도 그래요. 어머니.”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렇게 계속 불편하게 지낼 수만은 없지 않은가.

며칠이 흘러 일용엄니는 대낮부터 화가 났는데, 왜 그런고 하니 손녀 복길이가 뭔가 잘못했나 보다.
“고장 났구먼 이거. 냉장고 문을 하도, 이놈의 지지배 들락달락으로 열어 싸니까 냉장고 이놈의 거 고장 났잖아! 너 하루에 몇 번씩이나 여냐?”

어린 복길이가 대답한다.
“열어봐도 먹을 것도 없디다.”
“냉장고가 뭐 아이스크림 넣어놓는 냉장고야? 네 먹을 것만 다 넣어놓게! 이거 고장 났어, 큰일 났네.”

결국 일용엄니는 AS를 불렀다. 하지만 출장 나온 기사가 잠시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냉동실 온도조절을 최하로 해놓으니까 얼음이 얼지 않는 거라고, 사용법을 먼저 알아야 한다며 핀잔을 주고는 돌아갔다. 무안했던지 일용엄니는 밭일에서 자식 내외가 돌아오자마자 냉장고 사용법을 일러준다. 그러자 복길엄마가 우리 집에 무슨 얼음이 필요하냐며, 전기세 아끼려고 일부러 돌려놨다고 대답했다. 뛰는 시어머니 위에 나는 며느리, 찐 짠순이는 복길엄마였다.

무안을 당했던 일용엄니가 다시 슬쩍 냉장고 앞에 다가왔다. 일용엄니를 확인한 복길엄마가 묻는다.
“아니, 그게 뭐예요, 어머니?”
“이거? 도토리 나뭇잎이다.”
“뭐 하시게요?”
“이것을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김치 냄새, 신 냄새 이런 것이 쫙 빠진단다.”
“그래요?”
“그러고 뭣이냐. 야, 참기름 이런 거는 그냥 소금독에다 쿡 찔러놔도 안 상한단다. 뭐하러 비싸게 전기세 물어나가면서 참기름 이런 걸 냉장고에 넣어놓냐?”
“(살며시 웃으며) 어디서 들으셨어요?”
“아, 나도 배웠지. 아는 것이 힘이다.”

전원일기 마지막회 종영 후 단체사진. [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전원일기 마지막회 종영 후 단체사진. [사진 MBC 전원일기 캡처]

남의 집 안방을 내 집처럼 생생하게 들여다보는 드라마가 있을까. 마을 구성원들의 삶과 역사를 20년 동안 고스란히 담은 드라마가 있었다면, 과연 어린 친구들이 내 말을 믿을까. 바로 우리에게는 ‘전원일기’가 있었다. 198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무려 22년 2개월간 방영된 역대 최장수 프로그램이다(1088회). 마치 고향에 남으신 부모님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인기를 끌었다 한다. 그렇게 우리들의 추억을 간직한 드라마에서 냉장고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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