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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가 된 트럼프 최고 지지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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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트럼프주의’의 설계자, ‘트럼피즘(Trumpism)’의 최고 지지자.

미국 폭스뉴스 앵커, 터커 칼슨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2009년 폭스뉴스에 합류해 ‘터커 칼슨 투나잇’이라는 본인 이름의 프로그램을 4년째 진행하고 있다. 특유의 독한 표정과 쓴소리로 보수층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새로운 공격 지점을 제시하거나 탄핵 같은 궁지에 몰렸을 때 빠져나갈 길을 보여줬다. 칼슨이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다음 날 대통령 기자회견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칼슨의 과격함에 기업이 광고를 철회한 적도 있지만, 그럴수록 시청률은 치솟았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닐슨) 평균 시청자 수는 536만 명으로 케이블 뉴스 사상 최다 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했다.

반이민주의나 미국 우선주의 같은 철학에선 트럼프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으며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된다. 그러다 보니 “트럼프라도 트럼피즘에서 벗어나면 칼슨은 기꺼이 비난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폴리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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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가 트럼프에 맞섰다가 곤경에 처했다. 직접 맞선 것도 아니다. “엄청난 선거 조작이 있다”고 기자회견을 한 시드니 파월 변호사에게 증거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방송에서 이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파월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범죄일 수 있기 때문”에 거듭 캐물었다고 설명했다. 아마도 이번 선거에 베네수엘라 독재자 우고 차베스가 연계됐다는 대목에선 그도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자 트럼프 지지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증거를 법정에서 제시해야지 왜 방송에서 제시하느냐” “칼슨은 원래 양의 탈을 쓴 늑대” “시청자에 대한 배신이다. 손절이다”라는 글이 댓글과 트위터에 이어졌다.

결국 칼슨은 다음날 다시 트위터에 영상을 올렸다. “아무도 증거를 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 선거 부정이 없었다고 한 게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 모습이다.

증거 없는 주장을 내세운 것만으로 지지자들 사이에서 파월은 단숨에 “국민 변호사(‘We the people’ lawyer)”가 됐다. 그런 그를 “용기 있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운 폭스의 다른 진행자는 ‘참 언론인’이 됐다.

물론 모든 트럼프 지지자가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념에 붙잡혀 진실을 듣고 싶지 않은 일부의 목소리는 과격하고 유독 크게 들린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김필규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