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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수능이 위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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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세계 최고의 입시공화국, 대한민국. 어지간한 정책은 잦은 정권교체로 폐지되거나 단명에 그쳤지만, 입시 하나만큼은 고목(古木)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는 중이다. 입신출세의 길목마다 설치된 시험의 장벽은 이웃나라 중국, 일본과 비할 수 없이 단단하다. 한국에 태어난 이상 어쨌든 뛰어넘어야 한다. 고위관료를 시험으로 선발해온 나라는 드물다. 대기업 좁은 문에도 서류심사, 적성시험, 심층 면접시험이 부비트랩처럼 설치돼 있다. 잘 못 건드리면 인생이 산산조각난다. 실패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꿈에 나타날 정도다. 온 국민이 식은땀을 흘린 대가로 자원 없는 나라가 인재(人材)국가로 우뚝 섰다.

세계 최고의 입시공화국, 한국 #팬데믹 3차 유행과 국가 대사 #49만 명 청소년을 밀어 넣는가? #취소 혹은 강행, 정치결단이 절실

수학능력시험(수능)은 인생의 빛깔을 가르는 첫 번째 관문이다. D-10일, 잔뜩 긴장한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열기를 감지했는지 코로나 바이러스도 덩달아 세를 올린다. 하루 확진자가 300명을 돌파했다. 질병청장의 경고를 몇 번 새겨도 3차 유행의 기세가 무섭다. 전 세계 확진자는 누적 5천 6백만 명, 사망자는 140만 명에 달한다.

1919년 스페인 독감이 그랬듯이 코로나 3차 유행 역시 겨울 내내 극성을 부릴 것이다. 한반도에서 14만명 희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은 3월에 일본 열도로 건너가 소멸됐다. 세계가 칭찬한 K-방역의 방호벽을 뚫고 다시 확진자 숫자가 1천 명대로 치솟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야 할 시점에 딱 수능이 걸린다. 수험생 49만 명을 밀접, 밀집, 밀폐의 공간에 8시간 가둬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연기 혹은 강행?

과시(科試)를 천명으로 여겼던 조선도 국가대사를 몇 번 연기했다. 정변, 천재지변, 역병 등이 이유였다. 전국 각지에서 상경하는 1만 명 유생 대이동 행렬은 장관인데 막상 과시연기 방(榜)이 나붙은 광화문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광해군 12년(1620년), 기근이 덮쳐 과시가 다섯 차례 연기됐다. 하필 다시 잡은 날이 거둥일이었다. 정원(政院)이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지난 달 25일로 정하여 먼 지방 선비와 수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재차 연기하니 먼 도(道)의 선비들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 연기한다면 전대의 돈을 다 쓴 선비들이 식량자루를 여관방에 걸어두고 발을 동동 구르며 과거 날짜만 애타게 기다릴 것입니다”. 그래도 광해군은 궁중 의례를 위해 날짜를 다시 물렸다. 역병이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고작 기근과 의례 때문에 그랬으니 조정의 기강과 군주의 품격이 떨어졌다.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는 아니다. 일년 내 계속된 개혁 공방전과 볼썽사나운 정책으로 정권의 기강과 신뢰는 이미 바닥이니까. 다만 우리의 미래세대를 고위험 공간에 밀어 넣어야 하는지가 문제다. 수능 일주일 전 모든 학생에게 원격수업을 명하고 고사장 방역작업에 돌입하고는 있지만 공중에 퍼진 바이러스 포자까지를 요격하기는 난망이다.

고사장 방역은 시작에 불과하다. 수능 후 해방감에 젖은 젊은 혈기가 전국 상가와 식당을 두루 누비면 동선 추적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본시험이 닥친다. 논술과 면접은 밀집, 밀접, 밀폐를 감행할 또 다른 모험이다. 응시자 한 사람이 수시와 정시까지 평균 5차례 밀접 리스크를 감당한다고 보면 올겨울은 그야말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제철을 만난다. 코비드-19 사령부가 한국 공습 특명을 내릴지 모른다.

유은혜 교육부장관은 “어떤 경우도 수능 연기는 없다”고 못 박았다. 과거(科擧)공화국 수장다운 단호한 책임감?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연기로 빚어질 사회적 비용’은 감당불능이지만, 강행비용은 코로나 확산, 그것도 수험생과 국민 몫이다. 연기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올 대학입시틀을 바꿔야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학기 일정도 늦춰야 한다. 졸업과 입학이 늦춰지면 취업, 유학, 군입대, 승진 등 사회적 일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6·25 전쟁기에도 부산에 임시 천막학교를 열었던 나라다. 길거리에 전시(戰時)학교를 차렸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치러진 대학입시는 진학과 입대(入隊)를 갈랐다. 1951년 2월에 발표된 ‘대학생 징집연기조치’로 패전 와중에도 입시열풍이 불었다.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팬데믹의 기세를 어쨌든 꺾어야 한다. 대재앙 여부가 수능과 입시에 달렸다. 청소년들과 한국 운명을 고위험지대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입시요건을 맞추는 비책은 없을까? 필자는 두 시험 중 하나를 생략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를 권한다. 그것도 올해만 한시적으로 말이다. 첫째, 수능을 예전처럼 시행한다면 대학본고사는 수능, 학생부, 비대면 면접으로 제한하는 방식이다. 논술과 대면 면접은 절대 금지다. 둘째, 아예 수능을 전면 취소하고 학생선발을 대학에 일임하는 방식이다. 역시 밀집 논술과 대면 면접은 불허다.

수능을 고수하면 팬데믹이 한국을 강타할 공산이 크고, 수능을 취소하면 입시 공정성 대혼란이 발생한다. 그래도 양자택일? 공론과 정치적 일대 결단이 절실한 시점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