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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헤라 같은 나쁜 여자, 10년 후 무대 위 야수 되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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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라운지] 소프라노 박혜상

소프라노 박혜상은 내년 뉴욕 메트 오페라극장에서 ‘마술피리’로 주역으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전민규 기자

소프라노 박혜상은 내년 뉴욕 메트 오페라극장에서 ‘마술피리’로 주역으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전민규 기자

코로나19로 침체에 빠진 공연계에 유독 빛나는 라이징 스타가 있다. 이달 초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데뷔 앨범을 낸 소프라노 박혜상(32)이다. 현존 음반사 중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DG가 한국 아티스트와 전속 계약을 맺은 것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이어 두 번째다.

122년 역사 ‘DG’ 데뷔 앨범 #지난해 영국 오페라 무대서 주역 #찰스 왕세자 관람도 잊을 수 없어 #시간 흐를수록 ‘프리 스프릿’ 충만 #어려운 클래식에 계속 도전할 것

올해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해외 활동을 접었지만 박혜상은 달랐다. ‘헨젤과 그레텔’로 예정됐던 메트 오페라에서의 주역 데뷔가 미뤄지기는 했지만, 7월에 빈으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했고, 9월에는 뮌헨에서 오페라 ‘마리아 칼라스의 7가지 죽음’의 초연을 올리는 등 분주하게 활동했다.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중에 여주인공이 죽는 일곱 작품의 아리아를 일곱 명의 싱어가 부르는 독특한 무대였어요. 저는 ‘라트라비아타’를 맡았는데, 병에 걸려 죽는 역할이라 마음이 힘들었어요. 매일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코로나 이후 처음 부르는 아리아가 하필이면 이 곡인가 싶었죠. 하지만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DG와의 전속 계약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지난해 영국 글라인본 페스티벌에서 첫 주역을 맡은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직접 관람한 DG의 클레멘스 트라우트만 회장이 “다음 시즌에 어떤 앨범을 만들까”하고 물으며 계약을 제안했다. “저의 로지나 연기가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특별했다고 하셨어요. 해외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은 무대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됐죠. 공연 당일 영국 찰스 왕세자도 왔거든요. 왕세자에겐 예의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데, 저는 청바지에 백팩을 메고 갔죠. 무례를 범한 셈인데, 다행히 재밌는 친구라며 웃어주셨어요.”

신·구세대와 동·서양 경계서 활동  

트라우트만 회장에 의하면 박혜상은 ‘과거와 현대의 시대정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연결하는 아티스트’다. 무슨 뜻일까. “잘 모르겠지만 저는 경계에 있는 사람 같아요. 클래식만 하는데도 사람들이 팝페라를 해보라, 뮤지컬은 어떠냐고 하는 걸 보면 제가 모던한 느낌을 주는 모양이에요. 해외에서 활동하다 보니 동서양의 경계에 있기도 하죠. 구세대와 신세대의 중간에 있기도 하고요. 클레멘스에게 ‘선후배들 사이에서 내 몫이 중요한 것 같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시작으로 페르골레시, 헨델, 모차르트, 푸치니 등의 유명 오페라 아리아가 빼곡 담긴 데뷔 앨범 제목은 ‘아이 엠 헤라(I AM HERA)’다. 개명 전 이름이었던 ‘소라’와 지금 이름을 조합해서 만든 프로페셔널 네임이란다.

“그리스신화 속 질투의 여신과 무관하진 않죠. 저는 ‘나쁜 여자’가 되고 싶거든요. 담대하고 도전적인 매력도 있고. 결국 헤라가 제우스를 사로잡아 못 빠져나오게 하잖아요.(웃음) 이번 앨범을 통해 챌린지하고 싶었던 건 듣는 분들도 ‘아이 엠’ 뒤에 각자의 이름을 넣어보면 어떨까 하는 거예요. ‘아이 엠 순자’‘아이 엠 옥자’처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기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여정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DG 사상 첫 한국어 가곡 2곡 담아

‘DG’ 데뷔 앨범

‘DG’ 데뷔 앨범

그는 마치 연극배우 같았다. 리사이틀에서도 표정 연기를 듬뿍 담아 아리아를 부르는 그에게선 넘치는 끼와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졌다. “10년 후쯤엔 ‘와일드 애니멀’ ‘몬스터 온 더 스테이지’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저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요즘 제 모습이 좋아요. 노래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족함을 느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노래 외적인 모습은 지금이 가장 나다운 것 같아요. 이대로 가면 10년 후에는 굉장한 야수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제 안에 ‘프리 스피릿’이 강해지고 있거든요.”

어린 시절 그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개성이 강해 사람들 속에서 뭔가 낯선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제 안에 잠재된 끼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늘 ‘조용히 하라’ ‘말을 삼가라’고 가르치셔서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유학 가면서 자유로워졌죠. 미국에선 겸손과 자신감이 같이 갈 수 있더군요. 그걸 깨닫고 한동안 미국인처럼 되려고 행동했는데, 결국 실수였죠. 미국인이 되려고 할수록 그럴 수 없다는 걸 느꼈고, ‘아이 엠 헤라’도 거기서 나왔어요. 내가 누군지 모를 지경이던 혼란의 시기도 있었지만, 스스로가 가진 걸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는 게 중요하단 걸 깨닫게 된 거죠.”

데뷔 앨범 녹음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팬데믹으로 베를린에서 잡혔던 일정이 취소되어 거의 포기 상태였지만, 기적처럼 빈에서 비엔나 심포니카와의 연주로 녹음할 수 있었다. “제 녹음이 코로나 이후 DG의 첫 녹음이라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서로서로 조심해야 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다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어요. 매일 3시간 동안 쉼 없이 노래한다는 게 엄청난 집중이 필요한 일이더군요. 한 번 녹음할 때 페트병으로 8개 이상씩 물을 마셨는데, 제가 물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 줄 처음 알았어요.(웃음)”

이번 앨범에는 한국어 가곡도 2곡 담았는데, 이는 DG의 122년 역사상 최초다. 서정주 시에 김주원이 작곡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와 나운영 작곡의 ‘시편 23편’이다. “한국 문화를 알리고 싶기도 했지만 제 영혼을 전달하기 위해선 한국 곡이 제일 좋았어요. 오케스트라가 한국 가곡을 잘 이해 못 하니 가이드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죠.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않게’ 같은 애매한 경계를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가 아주 좋아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악기 편성을 기꺼이 다시 해주고 제가 원하는 색깔이 나오도록 애써주신 김주원 작곡가에게도 감사하고, 참 자랑스러웠어요. 리사이틀 때마다 가곡을 불렀지만 앞으로 더 많이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기회가 되면 가곡 앨범을 발매해서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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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팬텀싱어3’의 스타 유채훈, 존노, 길병민과 모두 친분이 있다. 좁은 성악계에서 같이 노래하며 동고동락했던 소중한 인연들이다. “채훈이는 동갑이라 어려서부터 친했고, 병민이는 대학 시절 행사 알바를 같이 뛰었죠. 존노는 미국 교회에서 제가 성가대 지휘를 할 때 부지휘자였고요. 함께 자라며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눈 친구들인데 다들 잘돼서 좋네요. 각자의 달란트가 다른 것 같아요. 이 친구들은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음악에 적합해 보이는데, 저는 클래식이 정말 좋고 거기에 만족하거든요. 어려운 길이지만, 계속 도전하겠습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더 자세한 기사는 포브스 12월호에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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