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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지능 정상인데, 남 이해 못해 ‘틀린 믿음 과제’ 실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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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호 22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자폐스펙트럼장애 〈2〉

자폐스펙트럼장애

자폐스펙트럼장애

“세리와 안나가 같은 방에 있어. 방에는 덮개 있는 바구니와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단다. 세리는 안나가 보는 앞에서 바구니 안에 자신의 토끼 인형을 넣었어. 그리고는 세리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밖으로 나갔고, 그 사이 안나는 바구니 속에서 토끼 인형을 꺼내 상자 안으로 옮겼어. 볼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온 세리는 자신의 토끼 인형을 찾기 위해 어디를 열어볼까?”

타인의 관점서 생각 능력 결여 #의사소통·상호작용 잘 못해 #18개월쯤 증상 확연히 나타나 #연구자들 유전적 원인에 주목 #형제 발병률 19%, 증상은 차이 #맞춤형 훈련으로 개선 가능

나는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영진에게 그림을 그려가며 위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던졌다. 영진이는 “당연히 상자에서 찾겠죠. 너무 쉬운데요?”라고 답했다. 영진이는 ‘틀린 믿음 과제(false belief task)’를 실패한 것이다. 정상적인 5~6세 아동이라면 이 질문에 대해 ‘바구니’라고 대답한다. ‘틀린 믿음 과제’란 사람이 자신의 믿음(설령 틀린 믿음이라 할지라도)에 근거해서 행동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이해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다. 위 내용은 영국의 임상심리학자 배런코언(Baron-Cohen) 박사 등이 고안한 샐리-앤 실험(Sally-Anne test)을 한국식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 실험은 ‘마음이론(theory of mind)’을 테스트하는 매우 유명한 실험이다. ‘마음이론’이란 인간의 타고난 사회적 인지 능력을 일컫는 것으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나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은 상당 부분 사회적 상식에 기반을 두고 인간은 이를 통해 타인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타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 능력으로, 만 3~5세 무렵 출현한다. 심지어 18개월 무렵의 아이도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이른바 ‘사회적 참조(social reference)’현상을 보인다. 1985년 배런코언 박사와 동료들은 ‘틀린 믿음 과제’를 자폐증 아이들에게 적용했다. 정상 발달 아동들과 지적장애 아동 중에서 ‘바구니’라고 대답한 비율은 85~86%였던 반면, 자폐증 아이들은 단 20%에 그쳤다.

영진이는 24개월 무렵 처음 외래를 방문했다. 엄마 손을 잡고 들어오는 영진이의 시선은 진료실 창문의 커튼에 가 있었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들어오면서 진료실 정면에 있는 의사와 눈이 자연스럽게 마주치고 그 순간 약간 긴장하고 눈치를 본다. 영진이는 정면에 앉아있는 나를 쳐다보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다. “영진아!”라고 불러도 대꾸가 없었고, 책상 위의 장난감 자동차로 바로 향하더니 책상에 얼굴을 대고 자동차를 좌우로 굴리며 바퀴 돌아가는 모습만 응시했다. 영진이 엄마와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는 영진이가 돌 무렵부터 이상 징후를 보였다고 말했다. “영진이 형이 자폐라서 동생에게도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어요. 그런데 영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눈도 거의 안 쳐다보고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육아 휴직도 연장하고 아이와 눈 맞추며 열심히 놀아주는데도 소통이 여전히 잘 안 되네요.” 엄마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빠가 엄마의 등을 쓸면서 위로하듯 바라보았다.

‘틀린 믿음 과제’ 자폐아 20%만 성공

“영진이 형의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요?” 나는 물었다. “영석이는 이번에 특수학교로 옮겼습니다. 자해 행동이 나타나 최근에 약물치료도 시작했는데 아직도 말을 거의 못합니다” 아빠가 대답했다. “영진이는 정상적인 아이로 잘 자라주길 바랐는데 영진이까지 형처럼 될까 봐 마음이 너무 무겁고 걱정되네요.” 아빠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영진이 쪽으로 다가가 자동차를 영진이로부터 떼어놨다. 영진이는 순간 “아악!” 소리를 지르더니 바로 뒤돌아서 탁상용 달력 쪽으로 갔다. 그러더니 “1,2,3,7” 하면서 숫자를 읊었다. “영진이가 숫자를 읽는군요. 다른 글씨들도 읽나요?” 부모를 향해 물었다. “숫자, 알파벳, 경고문, 표지판 글을 다 줄줄 읽어요. 저희가 가르쳐준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요” 엄마가 대답했다. 엄마는 영진이가 거실에서 놀고 있는 동영상을 보여줬다. 찢은 종이로 숫자를 만들어 거실 마루에 펼쳐 놓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진이는 뚜렷한 자폐스펙트럼장애 증상을 보였지만 두 돌밖에 안 된 나이에 심각한 정도를 단정할 수 없어 지속해서 관찰하기로 했다. 이후 영진이는 사회성 언어치료와 응용행동분석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자폐스펙트럼장애는 돌 무렵부터 신호를 보이다가 18개월 무렵부터 이름을 불러도 거의 반응하지 않고 상대방과 눈 맞춤을 하지 않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의사소통과 상호작용 능력이 질적으로 떨어지고 제한적인 관심사와 반복적인 행동을 보일 때 진단을 내린다. 영진이에게 나타난 제한적인 관심사와 반복적 행동은 ‘숫자와 활자, 자동차 바퀴 굴리기’ 등이었다. 관심사의 종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6개월이 지난 후 영진이는 말이 급격히 트였고 상당히 많은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만 상대방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거나 서로 주고받는 대화는 원활하지 않았다. 36개월이 지나면서 TV의 만화 대사를 다 외웠고 부모가 말하는 꽤 긴 문장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일도 있었다. 42개월 무렵 영진이는 종합 발달검사를 받았다. 언어는 또래 수준보다 높았고, 지능도 정상 범주였다. 어린이집에서 수업시간에 잘 앉아있기는 했으나 자유 놀이 시간에 혼자 구석에서 놀았다. 영진이의 관심사는 또래 친구들이 좋아하는 놀이와 달리 ‘숫자와 표지판 읽기, 안내방송 멘트 따라 하기, 계단 수 세기, 건물 층수 확인하기’ 등이었다.

자폐스펙트럼장애

자폐스펙트럼장애

어느덧 취학을 앞둔 영진이의 사회성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진료실에서 가볍게 시행한 ‘틀린 믿음 과제’를 포함한 면담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였다.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이 능력을 반복적으로 훈련할 경우 어디까지 향상될 수 있을까. 영진이가 스스로 사회적 인지를 학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기대했기에 더욱 고민이 깊어졌다.

영진이 부모는 특수학교에 다니며 아직 말을 거의 못하는 형과는 다르게 말도 잘하고 두 자릿수 덧셈·뺄셈까지 할 줄 아는 영진이가 같은 자폐스펙트럼장애라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자폐스펙트럼장애의 원인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지만 자폐를 연구하는 수많은 연구자는 유전적 요인에 주목한다. 일란성 쌍생아의 경우 한쪽이 자폐증을 지닐 때 다른 한쪽도 자폐증을 보일 확률이 80~90%에 이르고, 이란성 쌍생아의 경우 30~40%, 형제일 경우 약 17~19% 정도로 알려져 있다. 심각도까지 동일하게 유전되지는 않는다. 영진이와 영석이 형제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같은 자폐스펙트럼장애임에도 형은 중증이지만 동생은 예후가 좋을 것으로 기대되는 경증이다. 이러한 심각도의 차이가 어떤 요인에서 비롯되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사회성을 담당하는 수천 개의 유전자가 환경적 요인과 결합해 사회성 뇌 영역에 문제를 유발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회로가 영향을 받아 심각도의 차이가 생긴다는 가설이 있다. 중증 자폐증은 피질하 구조를 포함한 감각 및 감정 뇌 담당 영역이 주로 관여하고, 언어지연과 지적장애를 동반하지 않은 경도의 고기능 자폐증은 전두엽과 피질 구조를 포함한 추론 및 유연성 담당 영역의 회로가 주로 관여한다고 보고된다.

제한적 관심사, 반복적인 행동 보여

영진이와 영석이 부모는 자폐스펙트럼장애에 대한 개별화 맞춤 치료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두 형제에게 다른 치료 방향과 교육 환경을 제공해주느라 힘이 열배, 백배 들지만, 부모가 서로를 격려해가며 아이들 치료에 열정적이었다. 영석이는 최근 특수학교에서 반장을 맡아 나름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영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 입장에서 생각하기, 앞으로 벌어질 상황 예측하기, 농담과 진담 구분하기, 상대방 질문 의도를 파악하기’ 등을 배우는 사회성 또래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1~2년 후 영진이에게 ‘틀린 믿음 과제’를 다시 시행한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 통과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가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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