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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을 살해 흉기로 써 원망 듣고, 되레 유명해진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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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호 24면

[와글와글] 더글라스 케네디 『빅픽처』

그래픽=전유리 jeon.yuri1@joins.com

그래픽=전유리 jeon.yuri1@joins.com

인생과 여행, 스토리텔링에는 공통점이 많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으로 길을 떠나지만, 그 길 위에는 뜻밖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유혹이나 함정에 빠져 고난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람을 만나 출구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관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세 가지 패션이다. 열정이라는 이름의 패션(passion), 고유한 스타일을 의미하는 패션(fashion), 뜻밖의 시련을 만나는 수난극이라는 뜻의 또 다른 패션(passion)이다.

와이너리 친구가 알려준 포도주 #소설 덕에 유명해져 가격 급상승 #와인 먹고 취해 부인 임신시키고 #바람 피우는 단서 잡아 살인까지 #인생의 결정적 국면 전환점 역할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소설은 그 세 가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의 패션을 적절히 결합하고 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이 바로 그렇다. 그의 작품들에는 열정에 충만한 주인공이 자기만의 인생 스타일을 갈구하며 여행을 떠났다가 수난극을 당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가가 되기 이전 여행작가로서 활동했던 그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나’를 찾아 나서는 스릴러 형식 이야기

그는 뉴욕 맨해튼 출신이지만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런던을 기반으로 작가 경력을 쌓았으며, 파리와 베를린에 거주하는 등 늘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대표작 『빅픽처』는 성취의 의미, 일과 가족, 지금과 다른 인생에 대한 변신 같은 주제를 과감하게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누구나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경력·집·가족·빚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안전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제공하니까. 선택은 좁아지지만 안정을 준다. 누구나 가정이 지워 주는 짐 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짐을 떠안는다.”

『빅픽처』는 새로운 ‘나’를 찾아 나서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스릴러의 형식으로 그리고 있는데, 결정적일 때마다 포도주가 플롯 전환점(plot point) 역할을 한다. 플롯 전환점이란 ‘스토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국면’을 뜻하며, 스토리텔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로펌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이 부인을 임신하게 만든 계기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이탈리아 키안티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 취한 열정의 결과였다. 주인공의 인생 운명이 바뀌는 결정적 장면에서도 이색적인 포도주 이름이 등장한다.

클라우디베이 소비뇽블랑

클라우디베이 소비뇽블랑

“주문했던 연어를 샀어. 멋진 뉴질랜드 소비뇽블랑도 한 병 샀어. 와인 이름이 클라우디베이야.” “그 와인은 누가 추천한 거야?” “주류 전문점에 있는 허브.”

아내가 동네 사진작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단서가 되고 결국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다. 그 포도주 이름이 뉴질랜드 클라우디베이 산 소비뇽블랑(사진) 1993년이었다.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클라우디베이 병으로 게리를 내리친 것이다. 병을 크게 휘둘러 옆머리를 쳤다. 병의 반쪽이 산산조각 났다.”

소설 속 주인공이 벤 브래드포드, 게리 서머스, 앤드류 타벨이라는 세 가지 이름으로 살게 된 출발점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와이너리 주인인 친구를 통해서 이 와인을 알게 돼 소설의 모티브로 삼았지만, 그 와인이 살해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람에 한동안 친구로부터 적지 않은 원망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덩달아 그 와인 역시 유명해지면서 가격도 많이 올랐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처럼 『빅픽처』에도 ‘오크향이 적절하게 감도는 오리건 주의 매력적인 와인’이라는 렉스힐 샤도네이, 샤블리 등 다양한 포도주 이름과 마티니를 비롯한 각종 술이 등장한다. 로펌의 유대인 상사 잭 메일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는 주인공에게 충고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사무실에 늘 술을 준비해 두게. 고객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면 술을 한 잔 마시고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가끔 고객에게 술을 권해야 할 때도 있지.”

부인의 불륜으로 낙심한 주인공은 “블랙부시 위스키를 꺼내 3㎝쯤 마시고 나서 병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고 적고 있다. 애주가다운 설정이다. 그러면 소설 제목 『빅픽처』는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인생에 대한 큰 그림을 담은 말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사진과 작가의 삶을 구분하는 핵심 메시지를 의미하는 중의법으로 쓰인다. “사진가란 모름지기 수동적인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프랑스 출신 저명한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빅픽처란 결국 메시지다. 글쓰기와 사진의 메시지 전달법의 차이기도 하다.

빅픽처, 글쓰기·사진의 메시지 전달법 차이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사진가는 늘 상황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확실한 영상 하나를 원하지만 작가는 작은 일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세밀한 묘사가 없는 이야기는 맥없고 심심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글을 쓰려면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글 전반에 작가 자신의 시각이 담기지 않으면 작가가 관찰한 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

오랫동안 신문에 정기적으로 글을 썼던 그의 경험이 묻어난 문장이다. 에세이집 『빅퀘스천』에서 그가 표현했던 것처럼 여행이란 ‘움직이는 고해소’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밀한 비밀이나 어두운 상처 등을 털어놓을 때가 많다. 여행지에서 와글와글을 간절히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 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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