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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뉴턴 광학이론 넘어서려 20년 걸쳐 ‘색채론’ 완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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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8〉

괴테 일대기를 다룬 영화 ‘괴테’ 속 베르테르의 복장. 파란색 연미복과 노란색 조끼 차림이다.

괴테 일대기를 다룬 영화 ‘괴테’ 속 베르테르의 복장. 파란색 연미복과 노란색 조끼 차림이다.

19세기 초반,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베르테르 복장’을 하는 것이 금지됐다. 괴테(1749~1832)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를 흉내 내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베르테르 복장’이란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색 조끼를 뜻한다.

“색은 밝음과 어두움 만남서 생겨” #인간의 감각과 무관한 색채 부정 #현대물리학서 괴테 이론 재발견 #‘베르테르 옷’ 파란 연미복·노란 조끼 #당시 청춘들 ‘멜랑콜리 파랑’ 숭배 #한국·일본은 원래 녹·청 구별 안 해

어찌 보면, 파랑은 상당히 독일적인 색이다. 오랫동안 파랑은 아주 귀한 색에 속했다. 청색 염료가 금보다 비쌌던 시절도 있었다. 대부분의 민족 언어에는 ‘파랑’을 지칭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18세기 초,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야콥 디스바흐는 합성 안료기술로 파란색을 만들어냈다. ‘베를린 블루(Berlin blue)’ 혹은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라고 불렸다. 디스바흐의 발명 이전에 청색 염료는 십자화과의 식물인 대청(大靑·판람근)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대청은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나 매우 높은 귀족 계급의 옷치장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스바흐의 청색 염료는 만들기도 쉬웠고, 색깔도 무척 멋졌다. 프로이센 군대의 군복도 이 색깔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될 즈음, 파랑은 독일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색이 되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파랑을 ‘멜랑콜리 색’으로 숭배하며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다. 파랑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하늘과 바다의 색이었기에 더욱 간절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이 같은 ‘멜랑콜리 파랑’은 특히 두드러진다.

19세기 말, 독일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아돌프 폰 베이어(1835~1917)는 ‘인디고 블루(indigo blue)’를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고, 독일회사 바스프(BASF)는 이 인디고 블루 특허를 사들여 양산하기 시작했다.

미국선 ‘인디고 블루’ 청바지 사랑

색채론

색채론

미국의 파랑은 독일의 ‘멜랑콜리 파랑’과는 사뭇 다르다. 소박하고 튼튼한 청교도적 색깔이다. 미국의 초기 자본주의는 지극히 종교적이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만큼 프로테스탄트적 신념이 일상을 지배했다. 의복은 가능한 한 소박하고 실용적이어야 했다. 튼튼한 천에 인디고 블루로 염색하면 값도 쌌고, 오래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이 염료를 완전히 흡수하기에는 너무 두꺼워 염색이 되다 말았다. 이렇게 물이 빠진 듯한 ‘청바지’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 노동복으로 크게 사랑받았다.

대공황에서 벗어나 미국 자본주의가 안정되기 시작하던 1930년대 말이 되면 ‘청바지’는 여가활동을 상징하게 되고, 60년대에 이르면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색이 된다. 이렇게 파랑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시대마다 달라진다.

녹색과 파랑을 아예 구별하지 않는 문화도 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힘바족은 초록과 파랑을 구별하지 않는다. 색채구별 실험에서 여러 개의 초록 사각형 사이에 파랑 사각형이 하나 끼어 있었지만, 힘바족은 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초록색이지만 약간 밝은 초록 사각형이 하나 섞여져 있는 그림은 아주 쉽게 구별했다. 반면 서양인들은 그 밝은 초록 사각형을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연구자들은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면 색 자체를 아예 경험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신호등의 ‘녹색’을 여전히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한국과 일본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일본에 교통 신호가 처음 도입됐다. 신호의 색을 각각 ‘적색’ ‘황색’ ‘녹색’으로 정했으나, 사람들은 ‘녹색’을 습관적으로 ‘청색’이라고 바꿔 불렀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 전에 일본인들은 ‘녹색’과 ‘청색’을 구별하지 않았고, ‘녹색’은 ‘청색’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녹색’ 신호등을 여전히 ‘파란불’이라고 한다. 한자어 ‘녹색’은 있으나 ‘녹색’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은 없기 때문이다. 들판은 ‘녹색’이지만, 우리는 ‘푸른 들판’ 혹은 ‘파란 들판’이라고 한다. 채소도 ‘푸른 채소’라고 한다. 한국에서 ‘푸른색’은 ‘녹색’과 ‘청색’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녹색’이 자연을 상징하는 색이 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 이전 자연을 표현하는 색은 문화마다 제각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기는 ‘색’과 ‘대상’의 관계가 지극히 문화상대적이란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색을 지각하는 주체의 역할을 최초로 강조한 괴테의 ‘색채론’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괴테는 스스로를 ‘색채학자’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그를 색채학자로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페터 에커만(1792~1854)이 쓴 『괴테와의 대화』를 보면 자신의 책 『색채론』에 대한 괴테의 자부심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괴테는 반복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에커만은 쓰고 있다.

괴테의 색상환

괴테의 색상환

“시인으로서 내가 이룩한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조금도 자만하고 있지 않아…나의 시대에는 한층 더 훌륭한 시인들이 있었고, 또한 금후에도 그런 인물은 탄생할 것이야. 그러나 금세기 중에 난해한 학문인 ‘색채론’에 있어서만은, 내가 그것을 올바르게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나는 스스로가 적잖이 자랑스러워.” (『괴테와의 대화』, 동서문화사. 332쪽)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철학자, 시인, 정치가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괴테가 자신의 저작 가운데 그리 알려지지 않은 『색채론』을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교만하게 자신만이 색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괴테는 41세 되던 1790년에 『색채론』을 쓰기 시작해 61세가 되어서야 끝을 냈다. 20년을 몰두했다는 이야기다. 『색채론』에 대한 괴테의 자부심은 주로 뉴턴을 향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뉴턴에 대한 괴테의 ‘질투’는 대단했다. 당시에는 뉴턴의 광학이 유일한 설명체계로 각광받고 있지만 그의 이론에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고, 그 오류를 아는 이는 ‘백만 명 중 오직 자신만’이라고 괴테는 이야기한다. 이 우월감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색채론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견딜 수 있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뉴턴의 색채론을 폐기하고 자신의 색채론을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호언했다(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괴테의 ‘색채론’은 여전히 자신이 예언했던 만큼의 대우를 못 받고 있다). 에커만은 “괴테가 뉴턴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빈정거리는 미소와 더불어 비장한 눈빛을 보였다”고 쓰고 있다. 도대체 뉴턴의 광학 이론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까?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1808~1810). ‘멜랑콜리 파랑’이 두드러진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1808~1810). ‘멜랑콜리 파랑’이 두드러진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의 광학 이론을 담은 책 『옵틱스(Optics)』가 발간된 것은 1704년이다. 그러나 그 내용의 대부분은 30년 전인 1671년에 ‘왕립학회 철학회보’에 발표되었다. 핵심은 ‘백색광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철학자들이 설명하듯, 백색광이 변해서 색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백색광 안에 숨어있던 색들이 굴절률을 달리해 나타나며, 이는 프리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다양한 색들의 빛을 합쳐 다시 백색광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실험’을 통해 빛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괴테는 “색채가 백색광에 존재한다”는 뉴턴의 이론을 부정하며, “색채는 밝음과 어두움의 만남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밝은 면이 어두운 쪽으로 다가가면 청색이 나타나고, 반대로 어두운 면이 밝은 쪽으로 다가가면 노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만나는 경계선에서 나타나는 이 상대적인 현상을 괴테는 ‘원현상(原現像)’이라 불렀다. 이로부터 모든 색채의 생성과 변화가 설명된다는 것이다.

‘모순’과 ‘관계’로 존재하는 이 ‘원현상’은 인간의 직관을 통해 비로소 그 본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괴테의 색채론은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뉴턴의 광학 이론에서 관찰자가 설 자리는 없다. 그가 설명하는 현상이란 ‘객관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테는 인간의 감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색채를 부정한다. 인간 내면의 세계와 자연은 감각을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괴테의 색채론, 칸딘스키로 이어져

괴테 사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괴테의 색채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객관성의 신화’가 가장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물리학에서였다. ‘불확정성원리’를 주장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41년 발표한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와 뉴턴의 색채론’이란 논문에서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비판하며, 관찰이 관찰 주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대물리학의 연구 성과를 괴테 색채론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괴테에 따르면 주관적 세계와 항상 연계되어 있는 색채는 주관적인 ‘생리색’으로부터 중간단계의 ‘물리색’, 그리고 가장 객관화된 ‘화학색’의 3단계로 존재한다. 화학색은 노랑·파랑·빨강·주황·녹색·보라의 6가지 색으로 구성된다. 이 6가지 색은 인간 내면과 각각의 방식으로 관련된다. 이를 괴테는 1809년 발표한 ‘정신과 영혼의 상징화를 위한 색상환’에서 지극히 심리적인 언어로 구분해 표현한다. 이 같은 괴테의 색채론과 바우하우스에서 구체화된 칸딘스키의 색채론은 서로 매우 닮아있다. 지극히 심리학적이란 이야기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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