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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콩 지킴이 30년…40억 매각 제안 퇴짜놓은 ‘종자 박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8면

지난 11일 경남 진주시의 한 콩밭 옆에 비닐하우스 두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한국 야생·토종 콩을 보존하는 일에 30년을 매달려온 정규화(68) 전남대학교 교수의 콩 연구실이다.

7000종자 모은 정규화 전남대 교수 #콩밭 옆 비닐하우스 두 채가 연구실 #다국적 기업 “매출 1%” 제안 거절 #“토종 콩 연구 후계자 없어 걱정”

낡고 허름한 비닐하우스 안에는 마른 콩 줄기와 씨앗이 담긴 망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충남 천안, 전북 익산, 전남 여수 등 전국을 떠돌며 찾아낸 야생·토종 콩 종자로 올해 약 120점을 모았다.

이날 중앙일보와 만난 정 교수는 “한국 콩 보존과 연구에 외국이 더 관심이 많으니 아이로니컬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 콩 씨앗이 터지면 한 걸음씩 번식 지역을 넓혀가는 셈이란 말이 있다. 수천년 이어져 왔으니 콩이 얼마나 번식하고 진화해 왔겠는가”라며 “그 걸음을 하나씩 쫓아서 전국 곳곳을 돌며 모아온 종자들”이라고 했다. 외딴 섬, 깊은 산 곳곳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이렇게 모은 콩 종자 숫자만 30년 동안 약 7000점이다.

콩을 종자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년이다. 주기적으로 밭에 심어서 증식을 해줘야 한다.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 그대로 키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기도 하다.

지난 11일 정규화 전남대학교 교수가 올해 경남 진주에서 증식에 성공한 한국 야생·토종 콩 종자들의 외형 특징을 비교하며 유전적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1일 정규화 전남대학교 교수가 올해 경남 진주에서 증식에 성공한 한국 야생·토종 콩 종자들의 외형 특징을 비교하며 유전적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2012년 정 교수에게 세계 굴지의 종자 관련 다국적기업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그가 가진 아시아·한국의 콩 종자를 넘기면 해당 종자에서 나온 전 세계 매출액의 1%를 주기적으로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정 교수는 “40억원 정도 가치가 있는 제안이었다”고 말했다.

특별한 정부 지원 없이 수십 년을 버텨온 정 교수에게 솔깃할 법한 제안이었지만 거절했다. 정 교수는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교육자”라며 “다국적 기업이라면 충분히 노릴만한 건수지만, 종자를 넘기면 어떤 파장이 돌아올지 가늠할 수 없다”라고 했다.

한국인이 많이 먹는 청양고추가 외국계 회사 소유 품종이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콩은 ‘주곡’(主穀)이기 때문에 양념인 고추보다 식량 주권과 더욱 직결된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다양한 콩 종자를 모아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야 미래에 혹시 모를 재해와 질병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본다.

정 교수는 “콩의 원산지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인데 미국 등 유전자 조작 수입 콩이 우리 식탁을 점령한 와중에도 정부나 국민적 관심은 동떨어진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동연구 조건으로 홍콩 중문대학으로부터 연구비 6000만원, 한국 야생·토종 콩을 증식하는 조건으로 농촌진흥청으로부터 2000만원을 받아 매년 콩밭을 일군다.  그가 콩을 키우고 있는 3600㎡(1100평) 크기의 밭은 제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사준 땅이다. 정 교수는 “홍콩과 함께하는 한국 콩 연구과제 비중이 3분의 2 이상인데 미래에 이 종자들이 우리 것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정 교수는 언제까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지난해 정년퇴직해 정교수 자리를 내놓고 석좌교수로 물러난 데다 나이가 들면서는 콩밭 매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쳐서다.

정 교수는 “전남대 여수캠퍼스에 있는 콩 종자 보관실 직원도 올해부터 인건비를 못 줘 그만두게 했는데 그사이 온도·습도 유지장치가 고장 나 종자가 많이 죽었다”며 “학자들도 기피하고 돈도 안 되는 일인데 누가 이 일에 또 나설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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