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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인생의 ‘제로섬 게임’에 몸 던진 비련의 여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38)

여기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젊기에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를 책임지기에는 아직 어렸습니다. 어설픈 청춘의 사랑이 비극을 부르고, 진정한 사랑은 관객의 눈물을 훔치지요.

1893년 발표된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비극적인 여인의 사랑과 죽음에 관한 오페라입니다. 이 작품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당시에 권력이나 자본을 가진 특권층이 자유로이 애정행각을 누렸던 반면 여자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성적 순결을 요구했던 시대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답니다.

막이 오르면, 아미앵의 여행자 숙소 앞에 역마차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오빠와 함께 내리는 마농의 미모를 앞다투어 찬미합니다. 그러자 사랑에는 관심 없다던 학생 데 그뤼의 눈길도 마농에게 꽂힙니다.

혼자 쉬고 있는 마농에게 다가간 데 그뤼는 이름을 물으며 호감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제 이름은 마농 레스코’라며 아버지 결정으로 수녀원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네요. 그 말에 데 그뤼는 “당신에게 수녀원은 어울리지 않소. 다른 운명의 별이 반짝이고 있소”라며 다시 만나기를 간청합니다.

데 그뤼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리아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본적이 없어’를 부릅니다.

난 지금까지 저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본 적이 없어!
그녀에게 말하리라, 당신을 사랑한다고,
내 영혼은 새로운 삶으로
깨어났노라고...

이미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이 청춘은 죽음을 불사한 사랑을 직진하게 되지요.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 노신사가 동행중인 오빠 레스코를 이용해 마농을 납치하려고 숙소 주인에게 마차를 은밀히 준비시키지만, 그 사이에 서로 눈빛이 통한 데 그뤼와 마농은 그 마차를 훔쳐 타고 같이 파리로 도망간답니다. 통쾌한 탈출작전이지요!

뒤늦게 마농이 도망친 것을 알고 노신사는 뒤쫓으려 하지만 레스코가 만류하지요. 마농의 천성상 가난한 학생과의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오빠는 이미 알고 있던 겁니다.

호화로운 생활에 취한 마농. [사진 Flickr]

호화로운 생활에 취한 마농. [사진 Flickr]

막이 바뀌면 호화로운 노신사의 집에서 마농이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몸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데 그뤼와 함께 파리로 왔지만, 오빠의 예견대로 곧 헤어지고 노신사의 스폰을 받으며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마농은 한편으론 데 그뤼를 잊지 못합니다. 아리아 ‘이 부드러운 레이스 속에서’를 부르며 초라한 집이었지만, 달콤한 입술과 뜨거운 애무로 행복했던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지금은 풍요롭지만 외롭다는 거지요. 사람의 간사함은 끝이 없네요. 풍요로움과 행복함이 공존하기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또 알면서도 흔들리고 또 불행하다며 탄식한답니다.

외출을 앞둔 마농이 방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데 그뤼가 창문에 나타나 말없이 자신을 떠난 그녀를 힐난합니다. 그에게 마농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느냐며 오히려 그를 유혹합니다. 그녀의 구애에 결국 데 그뤼는 그녀를 뜨겁게 안고 달콤한 키스를 나누며 마농의 침대 위로 올라갑니다.

아뿔싸! 그때 노신사가 들어와 두 사람이 침대에서 뒹구는 광경을 보고 말았네요. 그가 자신의 배려에 대한 마농의 배신을 비난하자, 그녀가 노신사에게 거울을 들이밀며 자신을 차지하려는 것이 늙은이의 과욕 아니냐며 모욕합니다. 웬일인지 노신사는 분노를 자제하면서 조용히 물러갑니다.

잠시 후 레스코가 뛰어와 노신사가 동생을 절도와 매춘으로 신고했으니 속히 도망가라고 합니다. 급한 데 그뤼의 마음과 달리 보석 등을 챙기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마농.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장면이 바뀌고, 화가 모네의 고향으로 그가 어릴 적 해변의 바다를 보며 빛과 순간의 인상을 그리는 인상주의의 기초를 닦았던 항구 르 아브르. 사방이 어둑어둑한데, 마농은 곧 아메리카로 추방될 예정입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척박하고 거친 죽음의 땅이었지요. 데 그뤼는 레스코와 함께 그녀를 구출할 작전을 짜고 있습니다. 허나 작전은 실패하고 레스코는 달아납니다.

마농을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보내야 하는 데 그뤼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요. 그는 자신도 배에 태워달라고 호송선 선장에게 간청합니다. 죽음의 길이련만, 그는 오히려 기쁘게 마농을 포옹합니다.

이제 미국의 뉴올리언스 부근의 사막입니다. 두 사람은 유형지에서 도망쳤는데, 병들고 지친 마농은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예감합니다. 그런 그녀를 데 그뤼는 단지 안아줄 수 있을 뿐이지요.

변함없는 연인의 품에서 마지막 키스 그리고.... [사진 Flickr]

변함없는 연인의 품에서 마지막 키스 그리고.... [사진 Flickr]

마농은 그런 그에게 “키스를 해주세요. 마지막 키스를…”이라 합니다. 기력이 다해 이제 말할 수도, 들리지도 않는 마농은 조금이라도 그의 사랑을 느끼려 애씁니다. 데 그뤼의 절규가 울려 퍼지지만, 그녀는 죽음을 불사하고 곁을 지켜 준 연인의 품에서 숨을 거둡니다.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던가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지요. 마농은 아버지가 결정한 수녀원 대신 파리행 마차를 타면서 아비를 잃었고, 노신사를 택하면서 데 그뤼의 사랑을, 그리고 다시 노신사의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데 그뤼를 선택하면서 결국 체포되어 생을 잃게 됩니다. 허나 그는 결국 죽음 앞에서 진정한 사랑, 영원한 사랑을 얻지 않습니까? 잃지 않았다면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던 인생게임에 그녀는 거침없이 뛰어든 것이지요.

‘마농 레스코’는 우리네 삶의 원초적 본능, 할퀴어진 삶을 푸치니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보듬어준 위로의 오페라랍니다.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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