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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정자브로커 판칠 수밖에" 국내1호 정자은행 설립자 일침

중앙일보

입력

“사유리씨가 새 시대의 ‘뚜껑’을 열었죠. 이제 국가가 정자은행에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제시할 때가 됐습니다.”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의 박남철 이사장은 18일 "우리도 시대 변화에 맞춰 국가가 정자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대 의대 비뇨기과학교실 교수인 그는 1997년 국내 최초로 부산대병원에 정자은행을 설립했다. 부산대 병원의 정자은행은 난임 부부를 위한 인공수정 시술을 위해 운용하고 있지만, 기증받은 소수의 정자로만 운영해 수요를 맞추는 데 한계가 있다.

국내 1호 정자은행 설립 박남철 부산대 교수

박 교수는 병원에 정자은행 설립 후 지난 20여년 간 국가가 정자를 합법으로 매입·관리하는 공공정자은행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그는 “퇴임이 1년밖에 안 남았는데 정자은행과 관련된 사회적 논의가 이제야 이뤄지고 있다”며 웃었다. 박 교수는 이어 “우리나라는 생명윤리법, 모자보건법 등이 공공정자 은행 도입을 가로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규제만 하니 불법 매매·브로커 기승”

지난 1997년 국내에서 처음 '정자은행'을 설립한 박남철 부산대 의대 교수겸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이사장. [연합뉴스]

지난 1997년 국내에서 처음 '정자은행'을 설립한 박남철 부산대 의대 교수겸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이사장. [연합뉴스]

박 교수는 “국가에서 양질의 정자를 관리하는 공공정자은행을 도입해야 한다”며 “지금 같은 규제 속에선 불법으로 정자·난자를 거래하는 ‘블랙마켓’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는 “정자 기증을 받아 시술해야 하는 난임 부부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그나마 국내에 있는 정자은행엔 말 그대로 ‘씨’가 말라 정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난임 부부 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빈번하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5년 불법 정자·난자 매매 사이트 124곳을 적발했다. 지난해 7월 인천지법은 대리모 브로커에게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수요가 있는데, 정상적인 공급이 없으면 불법시장이 성행하기 마련”이라며 “비혼모뿐 아니라 난임 부부를 위해서라도 생명윤리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에서 보관 중인 냉동정자의 모습. 사진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에서 보관 중인 냉동정자의 모습. 사진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현행 ‘생명윤리법(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23조 3항은 정자·난자의 금전적인 거래를 막고 있다. 같은 법 27조 4항은 난자 기증자에겐 보상금 및 교통비 등을 지불할 수 있도록 했지만, 정자 기증자에겐 이마저도 줄 수 없도록 했다. 박 교수는 “2005년 ‘황우석 사태’로 생명윤리법이 강화됐는데,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며 “가이드라인, 지침이 아닌 법으로 윤리를 규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국내에도 비혼모 원하는 여성 있을 것”

방송인 사유리씨는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했다. [사유리씨 인스타그램]

방송인 사유리씨는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했다. [사유리씨 인스타그램]

박 교수는 ‘자발적 비혼모’ 사유리 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사유리씨처럼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갖기 원하는 한국 여성들이 분명 존재한다”며 “시대가 변하면서 가족의 개념도 달라졌다. ‘4인 정상가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진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사실혼 혹은 법률혼 관계에 있는 부부만 보조생식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미혼여성이 정자를 기증 받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인공수정 등 시술을 받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국민정서 고려한 공공정자은행 필요”

미국의 정자은행 nwcryobank에선 정자 기증자의 키, 몸무게, 머리색 등 유전정보를 모두 확인 후 선택할 수 있다. 미국은 상업적 전자은행 제도를 택하고 있다. 사진 nwcryobank 홈페이지

미국의 정자은행 nwcryobank에선 정자 기증자의 키, 몸무게, 머리색 등 유전정보를 모두 확인 후 선택할 수 있다. 미국은 상업적 전자은행 제도를 택하고 있다. 사진 nwcryobank 홈페이지

박 교수는 “선진국이라고 꼽히는 나라 중 공공정자은행이 없는 나라는 우리 뿐”이라고 지적했다. 국가별로 정자은행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다르다. 영국은 국가에서 직접 정자를 관리하는 국가정자은행을, 프랑스는 정부의 예산지원 및 관리감독 하에 운영하는 공공정자은행을, 미국은 상업적 정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박 교수는 “각 나라별로 국민들의 의식 수준 및 사회적 합의에 따라 다르게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며 “가격대별로 정자를 택할 수 있는 미국 방식은 국내 정서에도 맞지 않고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 국가의 엄격한 관리 하에 필요한 이들에게만 양질의 정자를 제공·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부는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면서 정작 정자은행에는 손을 놓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난임부부, 비혼모를 위한 법 개정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아 기자 kim.j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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