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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사기꾼 취급 받았다" 15년만에 양식 성공한 황금넙치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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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은행잎이 깔린 듯, 양식장 콘크리트 수조 바닥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일렁이는 물결에 양식장 조명이 비쳐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끔 바닥에 붙어 있던 것 같던 노란 물체가 휙휙 움직였다. 정체는 ‘황금 넙치’다.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의 수산 종자ㆍ양식 업체 ‘해연’이 길러냈다. 황금 넙치는 고동색인 일반 넙치(광어)와 달리 윤이 나는 짙은 노란색이다. 겉보기에 색깔만 다를 뿐, 모양과 크기는 일반 넙치와 같다. 황금 넙치를 양식하는 곳은 전 세계에 오직 해연뿐이다. 15년 가까운 연구와 노력 끝에 양식에 이르렀다. 올해 110만 달러(12억원)어치를 수출했고, 지난 10일 해양수산부가 주는 ‘2020 해양수산과학기술상’ 대상을 받았다.

제주 수산 업체 '해연' 서종표 대표 #15년 연구 끝에 황금넙치 양식 성공 #미국·베트남 등에 110만 달러 수출 #2020 해양수산과학기술 대상 수상

서종표 해연 대표가 직접 기른 황금 넙치를 들어보이고 있다. 권혁주 논설위원

서종표 해연 대표가 직접 기른 황금 넙치를 들어보이고 있다. 권혁주 논설위원

일본에서 들여오던 광어 수정란 국산화

제주도는 국내 양식 광어의 60%를 생산하는 본산지다. 수온과 환경이 적절해 1980년대 중반 광어 양식을 시작했다. 80년대 후반에는 양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바나나 수입 자유화 때문에 제주의 바나나 농가들이 대거 광어 양식으로 돌아섰다.(『백년식사』, 주영하)

해연의 서종표(57) 대표가 양식과 수산 종자(갓 태어난 새끼 물고기)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제주도 광어 양식의 태동기인 80년대 중반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큰 형이 하던 양식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서 대표는 “어려서부터 그냥 물고기를 보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처음엔 장어 양식을 하다 광어로 바꿨다. 당시 광어는 일본에서 수정란을 들여와 키웠다. 그런데 수정란이 여간 비싼 게 아니었다고 했다. 요즘 우리가 외치는 ‘소ㆍ부ㆍ장(소재ㆍ부품ㆍ장비) 독립’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서 대표는 ‘수정란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광어 인공수정은 잘 되지 않았다. 광어들이 자연에서처럼 알을 배고 짝짓기하도록 유도하려고 먹이와 수온, 빛을 비춰주는 시간 등 온갖 여건을 조절했다.

지식이 부족함을 느껴 늦깎이로 제주대 증식학과(현 해양생명과학과)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대부분의 시간은 양식장에서 광어를 지켜보며 보냈다. 강의실 공부보다 현장 실습 위주로 대학 생활을 한 셈이다. 서 대표가 “평생의 은사”라고 하는 이영돈 교수(제주대 해양과환경연구소장)도 힘을 보탰다. 80년대 중반 시작한 연구는 90년대 초반에 이르러 결실을 봤다. 지금 해연은 전국 광어 양식용 수정란의 80%를 공급한다.

광어 수정란과 더불어 ‘최고급 횟감’이라는 다금바리 양식에도 도전했다. 15년이 걸려 2000년대 초반에 다금바리 치어(稚魚ㆍ어린 물고기)를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간에 폐사하지 않고 횟감 크기로까지 키우는 것은 또 다른 기술이 필요했다. 결국 몇 차례 치어를 바다에 풀어놓는 정도에서 다금바리 사업은 접었다. 지금은 다른 업체가 다금바리를 양식한다. 대신 서 대표는 ‘다금바리의 아버지’란 별명을 얻었다.

황금넙치는 일반 넙치(광어)와 색깔만 다를 뿐, 어른 물고기의 크기와 생김새는 똑같다. [사진 해연]

황금넙치는 일반 넙치(광어)와 색깔만 다를 뿐, 어른 물고기의 크기와 생김새는 똑같다. [사진 해연]

다음 과제는 황금 넙치였다. “책에서도 봤고, 어쩌다가 한 번씩 ‘황금 넙치가 잡혔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도 했지요. 중국을 타깃 삼아 양식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긴, 맛이 별로여서 우리나라에선 푸대접받는 생선 ‘부세’도 금빛이 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귀하신 몸 아니던가. 중국 쪽 광어 거래처도 “황금 넙치 양식에 성공하면 대박 날 것”이라고 했다. 일단 광어 유통상과 양식장들에 “혹시 황금 넙치가 보이면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서 대표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광어 약 1억 마리를 길렀다. 그런데도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간 얻은 황금 넙치는 8마리뿐이었다. 그만큼 희귀종이다.

처음엔 당연히(?) 실패의 연속이었다. 새끼가 태어나도 병에 걸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 정부가 추진하던 ‘골든 시드 프로젝트(golden seed project)’의 도움을 받았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는 고부가가치 종자 산업을 키우는 정책이다.

'해연'의 직원이 수조에서 수출할 황금 넙치를 고르고 있다. [사진 해연]

'해연'의 직원이 수조에서 수출할 황금 넙치를 고르고 있다. [사진 해연]

실패에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

새끼가 무사히 크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상했다. 부모는 황금 넙치인데, 새끼는 고동색의 보통 광어였다. 크면서 색깔이 변해야 하건만,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해연의 윤영석(44) 연구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르면 열성 유전이어도 새끼 중에 25%는 황금색이 나와야 한다. 단순히 몸 색깔 유전 만이 아닌, 뭔가 다른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혔다고 봐야 했다." 서 대표는 “계속 실패하자 주변에서 사기꾼이라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사실 어미를 교배시켜 종자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10년은 필요하죠. 다금바리도 15년이 걸렸어요.”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수산과학원과 대학의 전문가들은 계속 도움을 줬다. 시작하고 11년이 지난 2016년 7월 드디어 황금 넙치를 얻었다. 1년 3개월 전 태어난 넙치 가운데 20%가 황금색이 됐다. 아기 때는 보통 광어와 똑같다가, 자라면서 몸 색이 바뀌었다. 여기서 얻은 황금 넙치를 결혼시켜 다시 새끼를 얻었다. 세대를 내려오며 금빛을 띠는 비율이 점점 높아졌다. 이젠 새끼 가운데 거의 3분의 2가 황금 넙치다. 한 세대 더 넘어가면 비율이 80%까지 오를 것이라고 한다. 점점 순수한 황금 넙치 혈통이 되어가는 것이다.

2017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국제 수산박람회에서 참가자들이 황금넙치를 구경하고 있다. [사진 해연]

2017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국제 수산박람회에서 참가자들이 황금넙치를 구경하고 있다. [사진 해연]

2017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국제수산박람회에 황금 넙치 4마리를 데려가 전시했다. 서 대표는 “연예인이라도 온 것처럼 수조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더라”고 말했다. “사겠다”는 주문이 꽤 있었으나 대량 양식을 하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해 처음으로 캐나다 등지에 수십㎏을 수출했다. 지난해에야 규모 있는 양식에 들어가 미국ㆍ베트남 등으로 수출했다. 주로 현지의 화교들이 먹는다. 수출 단가는 ㎏당 30달러(3만3000원)로 여느 광어의 두 배다.

내년에는 중국 수출을 시작하고, 국내 시장에도 내놓을 계획이다. 직접 양식은 물론, 다른 양식장에서 기를 수 있도록 갓 태어난 새끼를 공급하겠다고 한다. 맛은 어떨까. 주위에서 “일반 광어보다 약간 더 단 맛이 도는 것 같다”는 평을 얻었다. 서 대표는 “내 입에는 천하일미”라며 웃었다.

해연이 길러 수출하는 유럽 넙치 '터봇'. 색깔이 옅고 몸이 둥글다. 권혁주 논설위원

해연이 길러 수출하는 유럽 넙치 '터봇'. 색깔이 옅고 몸이 둥글다. 권혁주 논설위원

다음 도전은 문어 양식

광어 수정란과 다금바리, 그리고 황금 넙치까지. 다음은 뭔지 물었다. 답은 “문어”였다. “문어 양식에 성공한 사례가 전 세계에 없습니다. 미국ㆍ유럽에서도 먹을 정도로 시장성이 넓은데도 그렇죠. 게다가 희한하게 문어는 살아있는 놈과 냉동 사이에 별로 값 차이가 없어요. 공급이 넘쳐 값이 떨어진다 싶으면 냉동 저장해 가격 조절을 할 수 있는 거죠. 사실 지난해 문어 양식 연구를 시작했어요. 물론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육종이 그런 거니까요. 올해는 황금 넙치 양식을 늘리는 데 전념하느라 못 했는데, 내년부터는 다시 문어에 도전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