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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17세기 선비의 외침 “나라가 왜 이 모양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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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한국 실학의 개척자 유형원

실학의 비조로 꼽히는 반계 유형원은 조선 사회의 총체적 개혁을 주창했다. 『반계수록』 저술 35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경기 남양주 실학박물관 내부. [사진 실학박물관]

실학의 비조로 꼽히는 반계 유형원은 조선 사회의 총체적 개혁을 주창했다. 『반계수록』 저술 35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경기 남양주 실학박물관 내부. [사진 실학박물관]

“공(公)은 기이한 자질을 타고나서 신장이 8척이고 성긴 수염이 허리띠까지 드리웠다. (중략) 간사한 아전이 공을 보면 두려워할 줄을 알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공의 말을 들으면 부끄러움을 알았다.”

국가개혁서 『반계수록』 350주년 #사욕에 따른 법·제도 타락 꾸짖어 #공정한 분배·인사로 국력 키워야 #“노예세습제 폐지” 파격적 주장도

여기서 공은 반계(磻溪) 유형원(1622 ~1673)이다. 흔히 실학의 비조(鼻祖)로 꼽힌다. 조선시대 실학을 일군 파이오니어다. 반계의 육촌동생이자 제자인 유재원이 쓴 ‘반계선생언행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반계의 풍채가 꽤 위풍당당했던 모양이다. 이 언행록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였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대하는 법이 없었다. 자녀들이 혹 노복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엄하게 꾸짖으며 ‘너희들 어찌 감히 이러느냐’고 했다. 어린애가 곁에 있더라도 성인을 대하는 것처럼 했다.”

일가친척의 회고인지라 다소 미화, 혹은 과장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려 했던 반계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반계는 조선 사대부 처음으로 노비세습제 폐지를 주장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노비는 재산이다. 사람이란 똑같은 부류인데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여기는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전에는 나라의 부유함을 묻는다면 말의 수를 세어서 대답했다. 지금 우리나라 풍속은 어떤 사람의 재부를 물을 경우 반드시 노비와 토지로 대답하니 여기서 이 법의 잘못, 풍속의 폐단을 볼 수 있다.”

서적·편지 등 유물 30여 점 최초 전시

반계의 대표작 『반계수록』에 나오는 사자후다. 국사 시간 실학 첫머리에 나오는 그 『반계수록』이다. 반계는 비인격적 존재로 무시당한, 사회 최하층 천민으로 전락한 노비제의 혁파를 주창했다. 물론 그의 파격적 외침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지만 당대 신분제의 폐해를 비판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상기한 점은 지금도 시의성이 크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실학박물관을 찾아갔다. 『반계수록』 저술 350년, 간행 250년 기념 특별전 ‘반계수록,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내년 2월 28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규모는 소담하지만 일찍이 ‘나라다운 나라’ ‘인간다운 나라’를 희구한 반계의 족적을 돌아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무엇보다 전시장 한복판의 설치물이 주목된다. 사각형 우물 위로 『반계수록』 책장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반계가 후대 학자들에 미친 영향을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장 360도를 돌며 『반계수록』의 핵심 내용이 서로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① 반계가 소장했던 주척(周尺). 반계는 개혁을 위한 객관적 규범을 강조했다. ② 다산 정약용 집안에 내려온 『반계수록』과 ③ 저술 100년 후 영남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나온 『반계수록』. [사진 실학박물관]

① 반계가 소장했던 주척(周尺). 반계는 개혁을 위한 객관적 규범을 강조했다. ② 다산 정약용 집안에 내려온 『반계수록』과 ③ 저술 100년 후 영남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나온 『반계수록』. [사진 실학박물관]

『반계수록』이 다루는 분야는 넓다. 총 26권에 걸쳐 정치·경제·군사·사회·관료제도 등의 쇄신을 부르짖었다. 반계가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토지제도. 예나 지금이나 토지는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다. 농업국가 조선에서는 특히 그랬다. 반계의 발상은 혁명적이었다. 토지사유를 폐지하고, 이를 국가에 귀속시킨 후에 이를 농민·상인·사대부들에 차등 지급하는 공전제(公田制)를 제안했다.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가까운 발상이지만 당대 토지소유 불균형에 따른 폐해를 직시한 공적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부자는 끝없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으니 이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욱 가난해진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사회양극화가 더욱 가팔라진 요즘 사회를 꾸짖는 목소리로도 들린다.

반계가 단순히 토지공유화를 외친 건 아니다. 공전제에 기초해 세금·병역 문제 등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토지 생산력을 높이고, 세금을 제대로 거둬들이며 국가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일반 백성에 대한 양반들의 전횡을 경계했다. 공정한 과세, 정확한 법 집행을 위해 그가 직접 사용한 도량형 주척(周尺)도 전시에 나와 있다.

반계는 공(公)과 사(私)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했다. 이른바 분배의 공정성에 방점을 찍었다. 구체적으로 나라가 쇠약해진 원인을 사욕에 의한 법 제도에서 찾았다. “국가를 경영하고 법제를 세우는 데에는 결단코 조금의 사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사대부의 전유물인 과거제 대신 지역사회에서 검증받은 인재를 추천·선발하자고 했고, 국가의 폐단인 불필요하게 많은 관리를 정비하려 했으며, 관리를 한번 임명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게 해 성과를 내자고 했다.

김태희 실학박물관장은 “반계는 한국 실학의 뿌리임에도 자료 부족으로 그간 체계적인 전시가 열린 적이 없었다”며 “다산(茶山) 정약용에 앞서 조선시대 국가개혁의 큰 틀을 짠 반계의 정신을 돌아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기획전에는 반계 관련 유물 30여 종이 나왔다. 다산 집안에서 소장한 『반계수록』, 『반계수록』 필사본 배포 상황을 기록한 반계 증손 유발의 편지, 1781년 재간행된 『반계수록』 목판본 등이 처음 공개됐다.

다산 정약용 등 후대 학자들에 큰 영향  

유형원이 19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집필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반계서당. 그는 책 1만여 권을 들여놓고 옛 제도를 연구했다고 한다. [중앙포토]

유형원이 19년에 걸쳐 『반계수록』을 집필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반계서당. 그는 책 1만여 권을 들여놓고 옛 제도를 연구했다고 한다. [중앙포토]

『반계수록』은 저술·발간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 같다. 명문가 집안 출신인 반계는 두 살 때 부친을 당쟁으로 잃고 과거로 출세할 생각을 접었다. 특히 소년기에 겪은 병자호란의 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목격하고 31세 젊은 나이에 전북 부안 변산반도에 내려와 19년 동안 국가개혁 방안을 망라한 『반계수록』 집필에 전념했다. 1670년 완성된 책은 그 이상적 비전 때문에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이유로 외면받았으나 이후 후대 학자들의 꾸준한 재평가를 받으며 100년 후인 1770년 영조의 명으로 영남 감영에서 처음 목판본으로 간행됐다.

4년 전 실학기행단을 따라 반계가 칩거한 부안군 반계서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비탈진 산길을 제법 올라가니 1981년 복원된 반계서당이 나타났다. 350년 전 궁벽한 산속에서 나라가 유린당한 울분을 삼켰던 옛 선비는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무릇 법제를 만들 때 조금이라도 사의가 끼어들면 만사가 정당함을 잃는다. 대체로 공·사 두 글자는 천리·인욕이 나뉘는 길머리다”는 전시장 한구석의 문구가 매섭기만 하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반계는 적폐라는 말도 썼다. 청나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조선의 치욕을 과거 적폐를 바꾸지 못한 데서 찾았다”며 “적폐 청산을 내건 현 정부도 과연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에 『반계수록』을 언급할 만큼 반계의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며 “반계의 평등사상과 공정한 인재 기용은 당파를 초월한 가치다. 빈부 격차와 진영 대립이 더욱 심각해진 요즘을 반성하게 한다”고 말했다.

혁신의 땅 변산, 홍길동전도 품다

『반계수록』이 탄생한 변산이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독특하다. 전북 부안의 작은 반도인 변산은 밖으로는 서해와, 안으로는 산지와 접해 있다. 바다와 육지, 물산은 풍부했으나 선비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접근이 그리 쉽지 않았다.

유형원 이전에 변산반도는 허균(1569~1618)이 『홍길동전』을 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이 적서차별에 반기를 들고 새 세상을 연다는 내용이다. 허균은 조선의 지배질서를 비판한 반항아로 유명하다. 그는 ‘호민론(豪民論)’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들을 모질게 부려먹는 것은 대체 어떤 이유인가”라고 질타했다.

유형원이 변산반도에서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그린 것도 변산의 지리적 조건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어려서부터 전국 산천을 찾아다닌 그는 변산 우반동에 정착해 국가경영의 새 틀을 구상했다. 정호훈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공저 『도시로 읽는 조선』에서 “변산은 조선 후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이 깃들어 살며 천고에 다시 없는 생각을 다듬었던 곳”이라고 했다. 조선의 혁신 사상이 자라난 땅이라는 설명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