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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아웃사이더’ 대통령 트럼프가 정치적 올바름을 버린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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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나는 미국을 최우선에 둘 겁니다.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과 고액 기부자를 위해 싸우는 내부자(insider)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싸우는 아웃사이더(outsiderㆍ외부인)입니다.”

[박현영의 워싱턴살롱] #법보다 규범에 의존한 대통령직 #‘규범 파괴자’ 등장하자 흔들려 #“선동가 언어, 모두 귀기울이게 해”

4년 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미시간 유세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이렇게 연설했다. 정치 문외한인 자신이 부패한 기성 정치를 타파할 적임자라는 설득이 먹혔고, 트럼프는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자칭 ‘아웃사이더’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에 와서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그의 임기 4년은 ‘규범 파괴’의 연속이었다. 법적 의무는 없지만 오랜 기간 이어진 관행이나 전통, 사회적 합의를 마구잡이로 깼다.

바로 이 지점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은 열광했고, 비판론자들은 경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 답지 않음(unpresidential)’에 승부를 걸었다. 지난달 조지아 유세에서 "나도 마음먹으면 훨씬 더 대통령답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일을 해야 했기에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대통령직은 불문율에 따른 전통과 정치·역사학자들이 ‘규범’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법적 의무보다는 규범에 의존해 온 대통령직을 트럼프라는 이단아가 오면서 송두리째 흔들자 워싱턴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장 중요한 규범 중 하나인 대선 승복을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하는 가운데 워싱턴은 그가 규범 파괴로 바꾼 정치의 면면에 대한 평가가 한창이다. 역대 대통령이 지켜온 규범을 과감하게 깬 네 장면을 정리했다.

①정치적 올바름을 버리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인종·성별·종교 등에 대한 차별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백인우월주의를 옹호하는 등 정치적 올바름을 버렸다.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백인우월주의를 규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극우 무장단체를 향해 “물러서서 대기하라”고 말했다. 자메이카 출신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이 미국 출생이 아닐 수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등 유색인종 여성 하원의원 4명에게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서 망가지고 범죄로 들끓는 그곳을 고치는 것이나 도와라"고 했다.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로 불러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부채질했다.

제니퍼 머시카 텍사스 A&M대 교수는 WP에 “트럼프는 대통령의 언어가 아닌 위험한 선동가의 언어를 쓰면서 지지층을 자극하고 반대자들을 분노시켰다"면서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그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공적 영역에서 안건을 지배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소유의 플로리다주 도럴 리조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이곳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화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띄웠다가 거둬들였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소유의 플로리다주 도럴 리조트.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이곳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화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띄웠다가 거둬들였다. [AP=연합뉴스]

②직무 수행하며 경제적 이익 챙기기

미국 대통령들은 전통적으로 소유 자산을 백지 신탁하는 등 방법으로 경제적 이해충돌을 피했다. 사리사욕에 따라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두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자신은 소유권을 유지했다.

비정부기구인 '워싱턴의 책임과 윤리를 위한 시민들(CREW)'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3일까지 재임 기간 중 자신 소유 리조트 등에 523회 방문했다. W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을 수행하는 관료와 경호원 등이 리조트에 묵는데 들어간 비용은 250만 달러(약 27억원)에 달한다. 선거자금 모금행사 등 이벤트 개최 비용으로 트럼프 선거캠프 등이 지불한 돈은 560만 달러(약 62억원)에 이른다.

공짜 홍보와 멤버십 가격 상승은 덤이다. 외국 정부와 로비스트 등 미 정부를 상대로 일하는 이해관계자들이 벌어준 수입은 더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자신 소유 리조트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띄우다가 거둬들였다.

③숱한 거짓말에 바빠진 팩트 체크

트럼프는 대통령 말의 무게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팩트 경시는 취임식 날부터 불거졌다.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첫 브리핑에서 트럼프 취임식에 ”사상 최대 인파가 왔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취임식 사진과 대중교통 이용 데이터를 토대로 사실이 아니라고 언론이 지적하자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보좌관은 ”대안적 진실“이라는 표현까지 고안했다.

팩트를 중시하지 않는 대통령의 등장에 WP·CNN·뉴욕타임스(NYT) 등 언론은 팩트 체크팀을 강화했다. WP 집계에 따르면 9월 3일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2만 2510번의 허위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했다.

우편투표제도 때문에 무자격자나 민주당 지지자에게만 투표용지가 발송됐다는 식의 허위 주장은 80번 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한 거짓말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적 성과를 거뒀다“는 발언으로, 410번 했다고 한다. 사소하게는 페이스북 팔로워 수가 가장 많지 않음에도 ”페이스북에서 내가 1위다“, 뉴욕에서 태어난 부친을 ”내 아버지는 독일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일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흑인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에 군복을 입은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을 대동하고 거리로 나서 비판받았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흑인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에 군복을 입은 마크 밀리 합참의장 등을 대동하고 거리로 나서 비판받았다. [AP=연합뉴스]

④대법원과 군까지, 모든 것의 정치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 삶의 모든 이슈를 정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로나19 대응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위험성을 경시하면서 자신의 재선을 방해하기 위해 민주당이 꾸며낸 ‘거짓말(hoax)’이라고 했다. 지난 9월 브루킹스연구소는 코로나19를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와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변수는 소속 정당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4년 전 유세 때 대통령이 되면 지명할 대법관 예비 명단을 공개했다. 역대 대통령이 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웃사이더로서 보수 정체성을 의심받는 데 대한 방어 차원이었다. 그중 한 명인 에이미 코니 배럿을 임명하면서 막판에 보수표를 결집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지난여름 군을 투입해 인권 시위를 진압할 수도 있다고 말해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기도 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