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영민 생각의 공화국

대안적 질서를 구상하려면 문제의 ‘자연 상태’를 상상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과일을 쌓기 위한 첫걸음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드디어 내 주변에도 귀농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가. 무료한 고향이 지겨워 평생 도시 생활을 찬양하던 친구마저 시골에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꾸는 텃밭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화학 비료를 뿌리지 않은 자기 텃밭 야채가 크기는 작아도 맛은 얼마나 뛰어난지 감탄한다. 그 상추를 먹으면 자연이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 같아! 땅은 땀 흘리는 만큼 인간에게 보답을 해. 자식보다 나아! 살면 살수록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심해지는데, 아예 인간을 떠나 자연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어?

폭압·탄압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 #바닥에 쏟아진 사과를 주워담아 #사과들 간 균형을 잡는 것과 같아 #문제 해결 위해 자연상태 상상해야

그런가. 그렇겠지. 나도 새벽 배송 배달 식품들의 넘치는 포장재가 부담스럽고, 매해 갱신해야만 하는 공인인증서가 지겹고, 선거를 통해 한때 트럼프 같은 인간을 뽑기도 하는 민주주의도 안쓰럽고, 도시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성급한 놈들이 싫다. 시골에는 경적소리도 드물겠지. 경적소리 대신 새 우는 소리가 들리겠지.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서 번뇌에 휩싸여 있는 친구에게 그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 사진을 보내면 되겠는가. 당연히 되지. 정말 부럽다.

그러나 항변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친구가 꾸린 텃밭도 결국 자연이 아닌 문명이다. 그 텃밭을 가꾸기 위해서는 읍내의 농기구 가게에 가서 도구를 빌려왔을 것 아닌가. 도시에 있는 친구에게 ‘자연’을 자랑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찍기 위해서 휴대폰이라는 최첨단 문명기기를 사용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자연 예찬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자연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질서도 깃들지 않은 자연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그것도 대도시 서울 한복판에서.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던 시절 일이다. 대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오기 전 학생들의 상태는 어떤지 알고 싶었다.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것 아닌가. 방문 목적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고등학교 교실 뒷자리에 앉아 관찰을 시작했다. 오래전 고등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학생은 앞에 앉은 몇 명밖에 없었다. 수업 중인데도 학생들은 교실을 활보하고, 전화하고, 건너편으로 가로질러 가서 말을 걸고, 뭘 빼앗아 오고, 뺏기고, 하지 마아~라고 소리 지르고. 더 놀라운 것은 선생이 그러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내가 견학한 고등학교 교실에는 두 가지가 없었다. 체벌이 없었고, 질서가 없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공부했고, 대학 진학률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대학 입시를 일찌감치 포기한 학생들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 결국 자신들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상당수 학생들이 수업에 협조하지 않았다. 나아가 수업이라는 판을 엎어버리고 싶어했다. 그 모습을 묵과할 수 없는 선생은 체벌을 가했다. 엎드리게 하고, 몽둥이찜질을 하고, 때로는 던지고, 때로는 날아 차고. 최소한 성질이라도 더러워야 천방지축인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11년 3월, 마침내 체벌을 금지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통과됐다. 교실에서 폭력이라는 야만을 법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혹은, 제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체벌을 없앰으로써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행했다기보다는 한 종류의 야만에서 다른 종류의 야만으로 이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체벌 금지 이후 교실의 난맥상에 좌절한 어떤 교사는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때려야 하는데 못 때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도 학생을 체벌하지 않고 말로 잘 타일러 왔는데 이제는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 때릴 수 있는데 교사가 때리지 않는 것과 법으로 때리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학생들이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개탄이 나온다고 해서, 체벌이 다시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체벌의 대안으로서 제시된 상담과 자치가 허울 좋은 말의 잔치에 그치고 있을 뿐, 아직 현장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뜻할 뿐이다. 진정으로 대안적인 질서가 교실 안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체벌이 사라진 교실을 일종의 ‘자연 상태’라고 상상할 필요가 있다. 정치학 용어로서 ‘자연 상태’는 시골이나 전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원초적 상태를 말한다.

이 원초적 상태가 실제 원시 사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자는 물론 어떤 현대인도 원시 사회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자연 상태란 현재의 문제적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혹은 대안적인 정치 질서를 구상하기 위한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어떤 새로운 질서가 생겨날 필요가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무질서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 상태를 논한다.

예컨대, 학생들이 모여 이번 야유회를 어디로 갈까 논의하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고 생각해보자. 아무도 타인의 의견에 동의해주지 않아서 결국 야유회를 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것도 하나의 자연 상태로 상상할 수 있다. 모두가 야유회를 원했지만, 아무도 갈 수 없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상대를 설득할만한 의견을 내야 하고, 상대는 그 의견에 동의해주어야 하고, 그렇게 모인 총의(總意)를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도 아니라면, 야유회를 꼭 가야겠거든, 야유회에 대한 결정을 타자에게 위임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저 자기 선호를 메마르게 뱉어놓는 행위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님’이 보시기에 네 의견은 거슬린다는 태도만 유지해서는 결코 자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나만 망가질 수 없으니 너도 망가져 봐라 라는 시대정신을 가지고는 결코 자연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자연 상태를 벗어난 상태, 즉 ‘정치적’ 사회는 그냥 선물로 주어지지 않는다.

운 좋게 그럭저럭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에 태어났다고 해서 안심할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달리 고도의 문명을 건설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트럼프 치하의 미국을 보면, 인간은 야만으로 재빨리 회귀하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대안적 질서를 구상하려거든, 현재의 문제적 상태가 어떤 자연 상태이기에 우리는 보다 나은 정치 질서로 이행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자연 상태를 상상하느냐가 대안적 질서의 향방을 좌우한다.

수십 년에 걸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남긴 성취 중의 하나는, 시민에 대한 물리적 탄압의 정도와 가능성이 그 전 시대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질서를 유지하겠다며 존재했던 폭압이 꽤 사라진 곳에 이제 무엇이 남았나 물어볼 때다. 폭압에 의존하지 않아도 삶에 필요한 질서를 창출하고 향유할 수 있을 때까지 민주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반드시 폭력을 동반하지 않더라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적 상태를 일종의 자연 상태로 새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자연 상태는 도시 생활에 지친 중산층이 꿈꾸는 목가적인 전원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상태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은, 기존 질서와 그에 기생해서 거들먹거리는 기득권자들이 고까워서 차라리 자연 상태를 원했던 편의점 점원을 상기한 바 있다. “나는 트럼프가 마음에 들어요. … 그는 판을 흔들어 놓을 겁니다. 사과 수레를 엎어버릴 인물인 거지.” 스티븐 킹은 말한다. “과일 수레를 발로 차서 엎어버린 다음에, 그냥 자리를 떠버리고 싶은 욕망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길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주워 담아야 할 겁니다.”

정치는 과일 수레를 엎어버리고 싶은 원한이 애당초 생기지 않게 하는 일, 쏟아져 굴러다니는 사과를 차근차근 주워 담는 일, 그리고 제풀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과들 간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다. 비록 엎어진 수레를 방관하거나, 과일을 밟고 다니거나, 등 뒤에서 과일을 깎아 먹거나, 굴러다니는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이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