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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 흑백사진만 고집한 어느 사진가의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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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사진가 민병헌의 ‘새’ 시리즈. 깊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흑백 사진들은 모두 민 작가가 직접 프린트한 것이다. [사진 민병헌]

사진가 민병헌의 ‘새’ 시리즈. 깊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흑백 사진들은 모두 민 작가가 직접 프린트한 것이다. [사진 민병헌]

담백한 수묵화인 듯 또는 거친 목탄화인 듯. 여러 장의 흑백사진 속에서 ‘새’는 화면을 가득 채우며 창공을 날아올랐다가 때로는 수평선 끝에 점처럼 숨어버린다.

민병헌 수묵화같은 ‘새’ 사진 전시 #100년된 군산 서양식 고택서 작업

1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 나우에서  민병헌(66) 작가의 사진전 ‘새’가 열린다. 20년간 잡초, 안개, 강 등 여러 주제로 촬영하다 “재밌어서 한두장 찍어 본” 새 사진들만 모은 자리다. “지나간 건 미련 없이 다 잊어버려요. 그런데 나이가 들었는지 필름 정리는 해둬야겠다 생각하고 보니 새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찍은 시간·장소·광선도 다르고, 인화 톤이나 콘트라스트도 다 다른데 그게 또 매력이더라고요.”

민 작가는 1984년 개인전 이후 지금까지 아날로그 흑백사진만 고집하며 촬영부터 현상, 인화까지 혼자 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 스민 수많은 회색의 향연.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미묘한 이 색감을 사람들은 ‘민병헌 그레이(grey)’로 부른다. 36년간 흑백사진에만 몰두한 이유는 하나. 현상과 인화를 남에게 맡겨야 하는 컬러사진과는 달리 흑백사진은 전 과정을 직접 할 수 있어서다.

“처음엔 컬러사진도 해보고 싶었는데 약품값에 설비비용까지 돈이 많이 들어 포기했죠. 그나마 흑백사진은 만만했어요. 하하.”

사진가 민병헌의 ‘새’ 시리즈. 깊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흑백 사진들은 모두 민 작가가 직접 프린트한 것이다. [사진 민병헌]

사진가 민병헌의 ‘새’ 시리즈. 깊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흑백 사진들은 모두 민 작가가 직접 프린트한 것이다. [사진 민병헌]

암실에서 작은 소리도 거슬려 환기 팬도 없이, 마스크나 장갑도 없이 독한 화학물질과 씨름하며 낮과 밤을 거꾸로 산 세월이다.

“힘들죠. 나이 들수록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해지고. 내가 왜 이렇게 집착하나 생각해보니 열등감을 피해 도망갈 유일한 공간이 암실이더라고요.”

민병헌 작가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음악에 빠졌고, 친구와 같은 대학을 가려고 전자공학과를 택했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하지 않았다. 대신 신촌에서 만화방과 군고구마 장사를 하면서 우연히 카메라를 알게 됐다. 고등학교 은사이자 사진작가인 홍순태 선생을 찾아가 흑백사진을 배웠다. 1987년 ‘별거 아닌 풍경’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잡초’ ‘스노우랜드’ ‘폭포’ ‘강’ ‘누드’ 등을 주제로 작업했다. 모두가 디지털카메라에 빠져들 때도 그는 필름을 사용하는 롤라이 플렉스 중형 카메라만 고집했다.

“성격상 남의 손이 닿는 걸 싫어해서 디지털카메라를 못 써요. 인화를 맡겨야 하니까. 가장 큰 이유는 사진을 찍고 바로 보는 게 너무 싫어요. 배낭에 필름을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가 오늘 최고의 사진을 건졌다’는 충만감이 너무 좋죠.”

그는 사진을 소개할 때 수식어를 쓰지 않는다. 이번 새 사진에도 시리즈의 일련번호, 프린트 사이즈, 몇 년도 작업인지만 밝혔을 뿐이다. 촬영 장소도 없다.

민병헌 사진가. 그의 군산 작업실은 100년 된 서양식 고택으로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진 이은석(프리랜서)]

민병헌 사진가. 그의 군산 작업실은 100년 된 서양식 고택으로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진 이은석(프리랜서)]

“옛날부터 메시지가 없었어요. 내가 본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들어줘’라고 주장하기 싫어요. 그건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죠.”

그는 “촬영장소도 유명한 곳이 아니다” 라며 “그저 나만 즐기고 싶어 사람이 없는 새벽, 눈·비 오는 날을 골라 트라이포드를 받쳐놓고 마냥 바라본다”고 했다.

2016년 옮긴 군산의 작업실은 100년이 넘은 서양식 고택이다. 1960~80년대 전북 제일의 갑부가 살았다는 ‘고판남 가옥’. 이 집은 올해 초 집을 다루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300평 대지에 본채와 별채, 창고가 2개다. 정원엔 수십 종 나무, 꽃들이 자란다. 응접실에 오디오 시스템과 디자인 가구들을 들이고 ‘미국 뽕짝’ 컨트리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일상을 즐긴다.

“내가 암실에서 집요할 수 있었던 건 다른 데선 마냥 게을러서인데 디지털카메라 배우기가 얼마나 귀찮겠어요. 하하.”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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