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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밤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고양이에 발동한 모성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65)

아침에 문을 여니 개가 펄쩍펄쩍 뛰며 호소하듯 짖는다. “으허엉 허으엉. 마님, 내 친구에게 사고가 났어요.” 그러고 보니 고양이 울음소리는 나는데 현관 앞에 있어야 할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마당을 다 돌아도 없다. 이런 허튼 일엔 왜 모성애가 발동하는지 순식간에 가슴이 벌렁거린다. 그런데 언덕 아래 밤나무 밑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시박 덩굴에 손발이 묶여 꼬였는지 그 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난다.

“앵무야” 하고 부르니 내 목소리에 맞춰 더 크게 소리 지른다. 참 나 원. 버려도 될 옷을 찾아 입고, 장화 신고, 낫을 들고, 전투하듯 가시박 덤불을 헤치며 비탈을 내려간다. 밤나무 주위를 몇 바퀴 돌아도 고양이가 없다.

우리 집 앞엔 수십 년 된 커다란 밤나무가 있다. 내려가는 길이 너무 가파르다. 또 가시박이라는 덩굴식물이 온 사방을 덮어 이사 온 지 5년이 지났지만 밤 주우러 한 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다. 신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큰 밤은 맛도 없고 고생한 만큼 실속도 없다는 핑계로 단념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미안해하며 새벽에 와서 주워간다. 그런데 이런 일에 용을 쓰고 내려가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

6개월이 조금 넘은 녀석이라 천방지축 폴짝거리며 까불더니 나뭇가지를 붙잡고 장난치듯 올라가다가 너무 높이 올라간 것이다. [사진 pxfuel]

6개월이 조금 넘은 녀석이라 천방지축 폴짝거리며 까불더니 나뭇가지를 붙잡고 장난치듯 올라가다가 너무 높이 올라간 것이다. [사진 pxfuel]

아무리 찾아도 없어 끙끙거리며 다시 언덕을 올라오니 이 녀석이 밤나무 꼭대기서 내려다보며 야옹거린다. 잃어버린 자식 찾은 듯 안도감과 함께 화가 치민다. 6개월이 조금 넘은 녀석이라 천방지축 폴짝거리며 까불더니 나뭇가지를 붙잡고 장난치듯 올라가다가 너무 높이 올라간 것이다. 바람까지 불어대니 가지에 매달려 흔들흔들 불안하다. 동물 애호가들이 근처에 있었다면 당장 119를 부를 판이다.

앞집에 달려가 언니와 함께 감 따는 대나무 꼬챙이와 작업용 사다리, 긴 나무토막을 끌고 갖다 나른다.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놓고 내려 오라 해도 안 내려온다. 개가 짖으니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모여 있으니 지나가다 들어온다. 여자들은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무서울까’ 하며 작대기로 내려오라 고양이 소리를 내며 호들갑이고, 남자들은 걱정하는 우리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핀잔을 준다. “자식들도 그리 키우니 제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거여. 가만히 두면 스스로 올라간 길을 스스로 알아서 내려올 텐데 호들갑을 떨지”하며 차나 한잔 타오라신다.

저것이 ”무서워요, 살려 주세요” 라는지, “날 좀 보세요. 꼭대기까지 올라왔어요” 자랑하는지 어찌 아냐고. ‘재주부리는 놈 보호한답시고 끌어내리다 다리 분질러놓고 싸매주며 생색내는 게 요즘 모성애’라는 우스개에 모두 웃음이 터진다.

가끔 두 녀석의 목소리가 조용한 마을의 아침을 깨운다. 마을 회의한다는 방송을 해도 참석할까 말까 귀찮은데 아침 댓바람에 반상회 하듯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따뜻한 차 한잔과 과일 한 접시로 찬바람 맞으며 서서 추수 이야기, 곧 있을 이웃 잔치 이야기로 수다가 이어진다. 작은 녀석이 스토리를 만드는 골목 반장감이다.

이웃들과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녀석은 저 스스로 높은 곳에서 기어 내려와 우리 눈앞에 와서 애교를 부린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손자 생각이 난다. 얼마 전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손주를 하교시키러 가야 하는 딸이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를 기다려도 안 오니 둘이서 손잡고 2㎞가 넘는 길을 걸어서 왔단다. 딸은 자기 잘못은 뒤로 하고 위험한 길을 걸어왔다고 아이들을 혼냈다. 차로만 다니던 먼 길이 무섭지 않았냐고 놀란 모습으로 물으니 8년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모험을 한 아이답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찻길을 건널 때 신호등을 잘 보면서 건너고요. 그냥 쭉 걸어오면 돼요. 제가 도와 드리면 할머니도 잘 찾아올 수 있어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얼마 전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손주를 하교시키러 가야 하는 딸이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를 기다려도 안 오니 둘이서 손잡고 2㎞가 넘는 길을 걸어서 왔단다. [사진 pixabay]

얼마 전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손주를 하교시키러 가야 하는 딸이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를 기다려도 안 오니 둘이서 손잡고 2㎞가 넘는 길을 걸어서 왔단다. [사진 pixabay]

때론 우리의 일상적인 사건도 조금은 멀리서 바라봐주면 스스로 해결될 것인데 꼬집고 상처 내어 억지 약을 처바르는 꼴이 아닐는지 반성해본다. 다시 대나무 꼬챙이와 사다리, 긴 나무토막을 힘들게 제자리로 갖다 나른다. 고양이 녀석이 졸졸 따라온다. 애간장 태운 걸 생각하니 밉살스러워 못 본 척 발로 툭 차도 따라온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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