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다 - 판결 다시 보기

남편은 영화와 똑같았다…증거 없는 '관악구 모자' 살인 전말

중앙일보

입력 2020.11.11 05:00

업데이트 2020.11.11 06:41

일명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의 생전 사진.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일명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의 생전 사진.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일명 ‘관악구 모자 살인 사건’을 아시나요. 지난해 8월 서울 관악구의 한 철거 예정 빌라에서 여성 A씨와 4살 아들이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피의자로 지목된 건 놀랍게도 그의 남편 조모(42)씨였습니다.

[판다]

하지만 조씨가 이들을 살해했다는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살해 도구도, 살해 동기도, 살해 수법도 모두 명확지 않았습니다. 조씨는 “사랑하는 가족을 왜 죽이겠느냐”며 범행을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런 조씨에게 1심과 2심 모두 무기징역형을 선고합니다. 법원이 이런 판단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개, 사라진 칼,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 휴대전화

사망한 두 사람은 편안한 차림으로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A씨에게서는 횟수를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칼자국이 발견됐고, 아들의 얼굴은 베개로 덮여 있었습니다. 강력한 공격이 있었지만 아무런 방어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고, 프로파일러는 “잠든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범행도구일 가능성이 있는 식칼과 고무장갑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A씨의 휴대전화는 그가 누운 상태에서는 팔이 닿지 않는 침대 커버와 매트리스 사이에 있었습니다.

“강한 살인 의도 가진 치밀한 계획범죄”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당시 현장 모습.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당시 현장 모습.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1심 재판부는 현금과 귀중품이 그대로 있었고, 성폭력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살인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피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지문이나 DNA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므로 범인이 치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추측했습니다. 출입문을 억지로 열었다거나 물건들이 흐트러진 흔적이 없으므로 피해자들과 평소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두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 날 저녁 9시쯤 조씨가 집에 도착했고, 다음날 새벽 1시 35분쯤 떠난 사실이 CCTV에 찍혔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두 사람의 부부관계

두 사람의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조씨와 결혼한 A씨는 4년 동안 그의 작업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다 A씨마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앞으로 3개월만 매달 200만원씩 지원한 뒤 앞으로는 돈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조씨는 빌라에 발길을 끊었고, 그가 들른 횟수는 1년에 10번 정도였습니다.

참다못한 A씨는 2019년 2월 아들의 생일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남편에게 공방을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손편지를 보냅니다. 예술가로서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조씨는 곧바로 이혼을 요구했죠.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약 한 달 전, 조씨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사과합니다.

1심은 조씨의 행동이 공방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이었다고 의심했습니다. 조씨가 빌라와 공방의 보증금을 나눠야 하고, 양육비 부담까지 안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자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조씨에게 오랜 기간 만나온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A씨 사망 전 부부가 1년 동안 전화한 횟수는 106번이지만 조씨와 내연녀의 통화 횟수는 2468회에 달했습니다.

그가 본 영화 ‘진범’

영화 '진범'의 한 장면. [사진 영화 공식 스틸컷]

영화 '진범'의 한 장면. [사진 영화 공식 스틸컷]

1심은 조씨가 사건 전 시청한 영화에도 주목합니다. 영화는 친하게 지내던 두 쌍의 부부 중 한 부부의 아내가 살해당한 후 다른 부부의 남편이 살인 혐의를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화 속 살인 용의자에게는 내연녀가 있었는데 피해자를 내연녀로 착각한 아내가 진범이었습니다. 진범이 흉기인 식칼, 범행현장을 닦은 옷, 피해자 휴대전화를 숨겨 발견되지 않자 진범과 남편 모두 풀려납니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칼이 범행도구였고, 그 칼과 피를 닦은 옷을 진범이 감춰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점이 이 사건과 유사합니다. 심지어 영화에는 진범이 자신이 죽인 피해자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현장을 떠나며 피해자 휴대전화를 침대 밑에 숨겨두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1심은 “피해자들은 짧은 가족생활 동안에도 조씨를 지원하기만 했는데 조씨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 활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과 이기심에 아내의 경제적 지원 중단을 빌미로 이들을 살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내와 아들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피의자 남편 조모씨.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관악구 모자 살인사건'의 피의자 남편 조모씨.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조씨는 항소심에서도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결코 가족을 살해하지 않았으며 강력한 살의를 가질 그 어떠한 동기도, 이유도 없었다는 겁니다.

조씨의 변호인은 최후 변론을 통해 “그가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면서 얻을 수 있는 큰 경제적 이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내 소유의 그 어떤 재산도 탐낸 사실이 없다”며 경제적 이유가 살해 동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씨가 피해자들을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도 강조했습니다. 조씨 측은 “흉기는 특정조차 되지 않았고, 범행 실행, 증거 인멸 등과 관련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살인의 전문가라도 이 정도로 증거가 발견되지 않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망 추정시각에 켜진 ‘경마앱’

조씨는 경찰에서부터 법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밤 10시쯤 피해자들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가 아들이 잠든 상태에서 발로 머리를 차는 바람에 잠에서 깬 후 다시 잠이 오지 않아 공방으로 돌아갔다”고 진술했습니다. 그가 빌라를 떠난 밤 1시 반까지 분명 피해자들이 살아있었다는 겁니다.

2심은 법의학자의 진술, 휴대전화 사용 기록 등 객관적인 증거를 살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망 추정 시각이 새벽 1시 이후라면 제삼자의 범행이라는 조씨의 주장에 설득력이 생기게 됩니다. 재판부는 8명의 법의학자에게 A씨 위에 남아있는 내용물로 봤을 때 사망 추정 시각이 언제인지 물었고,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친 때로부터 짧게는 4시간에서 최대 6시간이라는 답변을 얻었습니다. 평소 A씨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늦어도 저녁 8시 전에는 식사를 마쳤을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는 조씨가 빌라에 머물던 시간대와 대부분 일치했습니다.

아내와 아들의 사망 추정 시각에 잠을 자고 있었다던 조씨의 말과는 달리 그가 휴대전화를 사용한 기록도 나왔습니다. 경마앱이었습니다. 당시 조씨는 내연녀와 처음 경마장을 방문한 후 경주가 있는 날에는 거의 빠짐없이 베팅했고, 경주에 관한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것을 기다릴 정도로 경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공과금 등을 이유로 50만원을 보내달라고 한 뒤 경마 비용으로 모두 탕진할 정도였습니다.

2심은 “조씨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서 피해자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한창 범행을 준비했거나 범행을 마친 후 잠시 경주 정보를 검색해본 상황으로 볼 여지가 상당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조씨가 피해자들을 살해한 사실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충분히 증명됐다”며 “간접사실에 기초해 살인죄의 유죄를 인정한 것도 수긍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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