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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규제 입법 속도전에 경제단체는 ‘각개전투’식 방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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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기업규제 3법’ 11월 정기국회서 처리되나

지난 9월 22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오른쪽)이 이낙연 민주당 대표를 찾아 경제 3법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전했다. 오종택 기자

지난 9월 22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오른쪽)이 이낙연 민주당 대표를 찾아 경제 3법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전했다. 오종택 기자

“(재계) 의견을 듣는 자리는 이제 끝내고 입법에 전념하려 한다.”(유동수 민주당 공정경제3법 TF 위원장)

여당 “경제계 의견 수렴 사실상 끝” #‘3% 룰’ 등 정부원안 틀 유지될 듯 #‘공정 경제’ 프레임 앞 재계 무력감 #“졸속 임대차법 혼란 재현” 우려도

“해결책이 법뿐인지, 하부규정이나 규범을 고치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해야 한다.”(대한상의 우태희 상근부회장)

지난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입법현안 토론회. 재계에서는 ‘기업규제법’이라 부르는 ‘경제 3법’(상법·공정경제법·금융그룹 통합감독법)을 놓고 민주당과 대한상공회의소가 연 행사다. 이르면 이달 내 법안 처리를 목표로 하는 여당이 경제계 의견 수렴을 위해 마련한 사실상 마지막 토론회다. 찬반 양쪽 전문가들이 나섰으나 기존 논리가 반복될 뿐 뾰족한 대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방청석의 한 기업인은 “답을 정해 놓고 의견 수렴 모양새만 갖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상황은 재계에 불리하고 돌아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시정연설을 통해 ‘공정 3법’의 조속한 통과를 주문한 데다, 야당인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도 원칙적으로 동조 입장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상임위 심사 과정에서 일부 보완하겠지만, 감사위원 분리 선임, 대주주 의결권 제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 등 정부 원안의 틀은 흔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상태다.

경제단체, ‘뭉쳐야 산다’는 옛말

다음날에는 손경식 경총 회장이 경제계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예방했다 . 두 경제단체 대표의 개별 행보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이들과 여야 대표와의 만남은 별 성과가 없었다는 평이다. [연합뉴스]

다음날에는 손경식 경총 회장이 경제계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예방했다 . 두 경제단체 대표의 개별 행보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이들과 여야 대표와의 만남은 별 성과가 없었다는 평이다. [연합뉴스]

토론회 다음날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이 서울 여의도에서 점심 회동을 했다. 회동 후 두 사람은 대한상의와 별도 행보 의지를 밝혔다. 김기문 회장은 “어제 토론회가 양쪽 주장만 하다 끝나버려 별 실효성은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고 지적했다. 손경식 회장도 “경총과 중기중앙회가 별도 공청회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안이 생기면 경제단체들이 똘똘 뭉쳐 연합전선을 펴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재계 연합전선의 균열은 이미 감지됐다. 지난 9월 16일 경제단체의 ‘상법·공정법에 대한 공동성명’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주도해 중기중앙회, 경총,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참여했다. 그러나 한 달 뒤 10월 7일 경총회관에서 열린 대책 논의에는 전경련이 빠진 5개 단체 부회장들만 참석했다. 두 모임 다 대한상의가 빠진 것도 눈에 띈다.

재계의 각개전투에는 복잡한 셈법이 작용하고 있다. 우선 ‘국정농단’ 조역으로 찍힌 전경련이 여당과의 대화에서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전경련이 맡아왔던 경제단체 ‘맏형’ 역할을 놓고 대한상의와 경총이 주도권을 다투는 기류도 있다. 무엇보다 대한상의 역할과 노선이 주목된다. 현 정부 초반, 전경련이 위축된 상황에서 경총마저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을 비판하다 미운털이 박힌 경험이 있다. 이후 대한상의가 자연스럽게 정부의 ‘재계 소통 파트너’ 역할을 맡았다. 이런 대한상의로서는 정부 정책에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전면 반대보다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대안 제시가 기업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3% 룰’ 놓고 조금씩 다른 입장

‘기업 3법’의 여러 내용 중 재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3% 룰’이다. 감사위원 분리 선임시 최대 주주 및 특수 관계인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겠다는 안이다. 재계는 투기 자본의 경영권 공격에 속수무책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실제로 투기 펀드의 공격을 받아본 삼성, 현대차, SK 등 대기업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3% 룰’에 대한 경제단체의 입장을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대한상의는 ‘보완책 마련’, 전경련·경총은 ‘절대 입법 불가’, 중기중앙회는 ‘큰 관심 없음’이다. 대한상의는 국회 제출 의견서에서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를 꼭 도입해야 한다면 투기 자본의 이사회 진출 시도 시엔 3% 제한 규정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 회원사 위주의 전경련과 경총이 3% 룰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포괄하는 대한상의로서는 대기업이 관심 가진 문제에만 전력을 기울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기중앙회에 3% 룰은 큰 현안이 아니다. 회원사의 1% 정도만 대상이기 때문이다. 상법상 감사위원회는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기업은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지만, 자산 규모 1000억원 이상 2조원 미만의 상장기업은 선택적으로 설치하게 돼 있다. 중기중앙회는 오히려 공정위 전속고발제 폐지에 더 신경 쓰고 있다. 법률 대응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각종 소송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원들도 내용 잘 모르더라”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한 경제단체 임원은 “국회에서 기업 3법 문제를 설명해도 내용에 대해 잘 모르거나 큰 관심 없는 의원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토로했다. 검찰·공수처 문제나 임대차보호법 같은 다른 현안에 밀린 것도 이유지만, 초선 의원이 많아진 21대 국회 구성과도 무관치 않다는 것이 이 임원의 분석이다. 중도 이미지를 강화하는 보수 야당의 행보도 기대 밖이다. 그는 “기업 규제를 ‘공정 경제’로 프레이밍하는 여당 전략이 먹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 대응이 사분오열된 가운데 정치권의 시계는 재깍재깍 흘러가고 있다. 여당 내 일부 의원이 비판적 의견을 내고 있지만,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채근에 큰 목소리를 내기는 힘든 상황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제대로 된 논의 없이 법 통과가 강행될 경우 기업활동 위축으로 이어져 투자 및 고용 감소 같은 부작용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며 “졸속 입법으로 전세 시장의 극심한 혼란을 불러일으킨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재판이 될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김종인의 경제민주화와 헌법의 경제민주화는 다르다”

김상철 한국질서경제학회장

김상철 한국질서경제학회장

김상철 한국질서경제학회장

지난달 초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경제민주화 개념을 신랄히 비판하는 학계의 입장문이 나와 관심을 끌었다. 독일어권에서 경제·경영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주축인 한국질서경제학회가 그 주인공. 학회는 “경제민주화가 기업 규제 입법의 논리로 이어지면서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고 한국 경제의 활력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입장문 작성을 주도한 김상철(사진) 질서경제학회장은 “경제민주화 개념이 잘못 쓰이면서 우리 경제에 큰 폐해를 가져오고 있어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독일 브레멘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한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기 한국재정정책학회장으로도 내정됐다.

김 위원장의 경제민주화 개념이 ‘궤변’이라고까지 이야기했는데.
“김 위원장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경제민주주의’를 같은 맥락이라고 주장한다. 개념이 뒤섞였다. 독일의 경제민주화는 과거 사회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개념이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마르크스주의자 힐퍼딩의 ‘조직자본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독일노동총연맹(ADGB)의 이론가 나프탈리가 제안한 사회주의 이행 프로그램이다. 질서자유주의에 기초한 사회적 시장경제와는 명백하게 대립할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사실상 폐기된 개념이다. 경제민주화가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경제민주화가 사회주의적 개념이라는 말인가.
“경제민주화 담론이 사회주의적 속성을 은폐한 채 권력 담론으로 진화했다. 개념 혼선이 고의인지 무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재벌 원죄론’으로 이어지며 사회적 갈등과 박탈감을 증폭시킨 것은 사실이다. 반기업 정서가 ‘시대 흐름’ 혹은 ‘시대 정신’일 수는 없다. 100년 전 자본주의 문제에 기초한 개념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지도 의문이다.”
경제민주화를 재벌 전횡을 막자는 문제의식 정도로 이해할 수 없나.
“용어의 엄밀성을 따지지 않고 대충 섞어 쓰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어긋난다. 현실에서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경제민주화로 포장된 ‘공정경제 3법’은 국가 권력의 비대화와 기업 경영 활동의 저해로 경제 위축을 가져올 것이다. 국내 기업이 투기자본의 공격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헌법 119조 2항에도 경제민주화 조항이 있지 않나.
“당시 헌법개정 소위원장을 맡았던 현경대 전 의원은 경제민주화를 관치 경제에서 벗어나 민간 주도로 전환하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재벌 규제를 뜻하는 지금의 경제민주화는 다른 개념이다.”

김 교수는 “기업 지배구조 형태는 나라마다 다르고 바람직한 모델에 대한 일치된 해답도 있을 수 없다”며 “국가는 시장의 자율을 존중하면서 큰 틀의 질서를 잡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