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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사람들은 읽씹 중인데···방미 강경화의 '난센스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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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을 방문 중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왼쪽)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국무부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한·미 관계 및 한반도 현안 논의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외교부]

미국을 방문 중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왼쪽)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국무부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한·미 관계 및 한반도 현안 논의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외교부]

대선 이후 워싱턴에서는 ‘승자 대 패자’가 아니라 ‘승자 대 불복자’ 간 초유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미국 방문은 그야말로 ‘이 와중에’ 이뤄졌다. 양쪽을 다 접촉해 한·미 동맹 강화를 꾀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다.

바이든, 트럼프 정책 비판하는데 #강경화, 폼페이오 만나 한반도 논의 #문 대통령은 “트럼프 임기 내 성과를” #“바이든의 대북·한미 기조 분석 #달라질 외교 대비하는 게 중요” #강, 트럼프 정부와 협의 실익 없고 #바이든 진영 사람 만났다지만 #양쪽 접촉, 모두에 신뢰 잃을 우려 #송영길 등 여당도 16일 방미 예정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강 장관의 방미 계획 발표 이후 “왜?” “그것도 지금?”이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물러날 트럼프 행정부와의 업무 협의는 실익이 없고, 조 바이든 당선인 캠프나 인수위는 외국 정부 인사와 접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한반도 태스크포스(TF) 소속 송영길·김한정·김병기·윤건영 의원도 16∼20일 미 워싱턴을 방문해 바이든 측 인사들과의 만남을 조율하겠다고 밝혔다. 박진 의원이 이끄는 국민의힘 외교안보특위도 방미를 검토 중이다. 정부뿐 아니라 정치권도 앞다퉈 ‘바이든 앞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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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이든 측과는 가능한 모든 경로로 인맥을 구축하는 게 맞다. 하지만 하려면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하기 전 진작, 물밑에서 했어야 한다. 현재 바이든 인수위는 미국 주재 외교사절들이 e메일을 보내도 일절 응답하지 않는 ‘읽씹(확인하고 답하지 않음)’ 모드를 가동 중이라는 이야기까지 워싱턴에선 나온다.

이른바 ‘마이클 플린 효과’ 때문이다. 전 국가안보보좌관인 그는 트럼프 인수위 시절 러시아 대사와 만나 대러 제재를 논의해 놓고, 연방수사국(FBI) 조사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해 위증 혐의로 기소됐다.

지지 않았다고 버티는 트럼프 측도 속이 편할 리는 없다. 폼페이오 장관은 강 장관과 9일 업무 오찬을 했을 뿐이다. 외교부는 두 장관이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결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승복하지 않는 트럼프와 공화당 입장에선 바이든 쪽과 접촉하러 다니는 한국이 가볍게 보일 수 있다. 바이든 측은 한국이 그간의 인연을 바탕으로 만남을 조르는 것처럼 보여 부담을 느끼거나, 면담 금지 원칙을 어기고 한국과 만나주는 인사들의 입지가 오히려 약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교는 신뢰가 관건인데,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국의 외교부 장관이 직접 움직인 게 오히려 부담을 더 주는 게 될 수 있다. 한 전직 외교관은 “주미 대사관의 정무공사가 하면 되는 일에 장관이 나서니 급을 맞춰야 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부담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10일 바이든 진영에 속한 조야 인사들을 만났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채널 구축의 의미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사실 지침은 문재인 대통령이 9일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바이든 당선인’으로 부르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에 어떤 공백도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바이든 측에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알리고 협력을 요청하는 게 강 장관의 임무라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다. 강 장관은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8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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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전략적 인내가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 관여 정책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9일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전략적 인내는 민주당 내부에서도 실패한 전략이라 스스로 가져올 리 없다”(9일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등 비슷한 발언이 정부 안팍에서 쏟아진다.

문재인 정부와 바이든 당선인의 북한·중국 인식 차

문재인 정부와 바이든 당선인의 북한·중국 인식 차

말 자체에 오류가 있다. 바이든 측은 아직 대북 정책은 물론 한반도 라인 인사도 손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는 코로나19 대응, 경제 재건, 인종차별 해결 등 국내 문제를 우선 과제로 정했다. 그런데 제3국인 한국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앞다퉈 바이든 정부가 전략적 인내로 회귀하네 마네를 ‘예언’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또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대북 정책의 기조로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이 표현을 굉장히 불쾌하게 받아들인다는 건 외교가의 상식이다.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성급하게 우리 입장을 밝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바이든 측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가 목적의식을 갖고 이런 인식을 퍼뜨리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정부의 대북 정책 설득이 아니다”고 우려했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바이든 측이 집중하려는 것은 동맹 복원, 즉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인데 정부가 대북 정책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만남이 이뤄져도 논의의 층위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정부는 “지금까지 트럼프 정부와의 사이에 이뤄낸 소중한 (평화 프로세스) 성과가 차기 정부로 잘 이어지게 하겠다”(9일 문 대통령), “(트럼프 행정부) 3년간 성과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9일 강 장관) 등의 입장 표명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대북 접근법 때문에 미국이 더 위험해졌다는 입장인데, 한국은 이를 계승하라고 촉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황준국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트럼프의 거래적 동맹 개념과 달리 바이든은 민주주의, 인권 수호라는 공통의 가치가 동맹의 기반이라고 본다. 인권 문제 등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에 사실상 침묵해 온 한국 정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한·미 간 현안도 트럼프 정부 임기 안에 해야 할 일은 미루지 않겠다”고 한 것도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다. 어떤 현안이든 차기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동맹의 결정이 될 텐데, 이를 물러나는 트럼프 행정부와 매듭짓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어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바이든 시대에는 동맹 간에 떠오를 이슈, 가라앉을 이슈가 트럼프 때와는 달라질 것이다. 미·중 갈등만 해도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텐데, 내부적으로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게 전혀 준비되지 않은 당선인 측을 접촉하는 것보다 우선”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외교안보 라인의 핵심인 토니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은 2018년 6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대북관을 드러냈다. “비핵화 약속이 북한의 현재 핵 능력을 줄이지 않는다. 북한은 과거에도 비핵화 약속들을 수없이 깼다”면서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런 조각조각의 단서들을 종합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향할 방향을 연구하는 것이다. 또 정부의 정책에 반영할 부분은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이다. 만나지 않겠다는 쪽에 일단 만나자고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때가 아니다. 한 발 앞서가면 선각자가 될 수 있지만 열 발 앞서가면 길을 잃고 외톨이가 될 수도 있다.

유지혜 국제외교안보에디터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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