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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랑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가 아닐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35)

어진이는 휴학 중이다. 홈스쿨링으로 5년 가까이 집에서 공부하다가 올해 대학에 합격한 어진이는 부푼 기대감으로 새학기를 시작했다. 벚꽃이 피면 분홍빛 거리를 거닐고, 대학 축제에 가고, 미팅도 해보겠다며 스무 살의 봄을 설레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1학기 내내 학교 한번 가보지 못했다. 같은 과 친구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산더미 같은 과제를 하면서 지루한 한 학기를 보냈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어진이는 휴학을 결정했다. 홈스쿨링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대학생활을 잠시 쉬기로 했다.

요즘은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고, 기타를 치고, 은지랑 같이 운동을 하면서 지낸다. 일주일에 두 번은 검정고시 학생들 멘토링 수업을 하고, 한 달에 두어 번은 굿네이버스 인형극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아침엔 은지를 챙겨 유치원까지 걸어서 데려다주고, 바닷가에 앉아서 신문을 읽다가 들어온다. 오후엔 은지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집으로 온다.

함께 체조하는 어진이와 은지. [사진 배은희]

함께 체조하는 어진이와 은지. [사진 배은희]

어리다고 생각했던 어진이가 은지를 챙기는 걸 보면, 이렇게 ‘내리사랑’을 할 때 진짜 어른이 되는구나 싶다. 어진이는 검정고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더 많이 배운다고 했다. 사랑도 내가 행동할 때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가 아닐까? 같이 놀고, 같이 먹고, 같이 걸어가고, 같이 사는…. 역동적인 일상이 ‘사랑’이 아닐까? 미국의 작가 어슐러 르 권은 ‘사랑은 돌처럼 한번 놓인 자리에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빵처럼 매일 구워져야 한다’고 했다.

매일 움직여야 하는 것, 매일 애써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아침마다 은지를 깨우고, 옷을 챙기고, 머리를 묶어주면서 우린 그 사랑을 배워가고 있다. 저녁엔 그림책을 읽어주고, 잠들 때까지 어깨를 토닥여주고, 자다가 깨서 이불을 덮어주면서 그 사랑을 조금씩 실천해보고 있다.

나도 처음 배우고, 처음 해보는 사랑이다. 쌀쌀맞고, 수동적인 내가 무한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가정위탁을 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지금도 하늘의 뜻이라고만 뭉뚱그려 말하는 이유가 내가 나를 알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을까?’, ‘조금 흉내 내다가 포기하진 않을까?’, 처음엔 온갖 생각을 하면서 시작했었다. 나는 사랑이 마구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정말 평범한 사람이니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신앙인으로서의 작은 ‘책무’를 느끼고 있는 것뿐이다.

나도 처음 배우고, 처음 해보는 사랑이다. 쌀쌀맞고, 수동적인 내가 무한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가정위탁을 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사진 pixabay]

나도 처음 배우고, 처음 해보는 사랑이다. 쌀쌀맞고, 수동적인 내가 무한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가정위탁을 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사진 pixabay]

입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하는 사랑. 보여주는 이벤트 같은 사랑이 아니라 오래오래 삶으로 살아내는 사랑.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탁엄마로 ‘살아내는 것’은 내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밤잠을 설치는 건 기본이었고, 뼈마디 마디까지 피곤이 스며들면 서서 내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다. 지인들도 어느 날 갑자기 아기 엄마가 된 나를 낯설어했다. 임신과 출산이 아니라 가정위탁제도로 은지 엄마가 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왜 그렇게 특별하게 살려고 해?”
“뭔가 (이익이) 있겠지….”

육아 때문에 밥도 식구들끼리 번갈아 가면서 먹고, 외출도 은지 컨디션에 따라 하고, 고민 끝에 결정한 내 진학도 학비까지 내놓고 휴학했는데…. 가까운 지인들도 그걸 알아주기는커녕 쉽게 말하는 모습에 슬프고 아리기도 했다.

일일이 답하기보다는 내가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가장 명확한 답일 것이다. 구름은 흘러가고, 계절은 바뀌고, 어느새 단풍이 든 것처럼. 우리 인생은 또 흘러가고 바뀌고 물들 테니까. 오늘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다를 테니까.

요즘은 어진이도 휴학하고 집에 있어서 은지를 함께 돌봐주니까 조금 숨통이 트인다. 책도 한권 펼쳐 보고, 맛있는 커피도 한잔 마신다. 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가 더 빛나는 오후다.

가정위탁제도란? 친부모의 사정(이혼, 수감, 질병 등)으로 친가정에서 아동을 양육할 수 없는 경우, 일정기간 위탁가정을 제공하여 보호하고 양육하는 아동복지제도다. 성범죄, 가정폭력, 아동학대, 정신질환 등의 전력이 없으며 법이 정하는 기준에 적합한 가정에 위탁된다.(아동복지법 제3조)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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