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 김혜수 “실제 죽은 채 방치된 꿈 1년 꿨죠”

중앙일보

입력 2020.11.0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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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화 내가 죽던 날은 김혜수가 ‘국가부도의 날’ 이후 2년 만에 스크린 복귀한 작품. 전작 이상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돋보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내가 죽던 날은 김혜수가 ‘국가부도의 날’ 이후 2년 만에 스크린 복귀한 작품. 전작 이상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돋보인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목을 봤을 때 이미 마음을 빼앗긴 느낌이었어요. 저한테는 운명 같은 영화죠.”

남편 외도로 이혼 소송 중인 형사 역
이정은·노정의·김선영과 뭉클한 공감

“과거에 심리적으로 죽었던 적 있어
이번 영화 속 악몽에 경험 살렸어요”

12일 개봉하는 새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에서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형사 현수를 연기한 김혜수(50)의 말이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 소송으로 고통받던 현수는 복직 전 외딴 섬에서 실종된 한 소녀의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섬으로 향하지만, 믿었던 가족에게 배신당한 소녀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실종된 소녀 세진 역의 신예 노정의, 목격자인 순천댁 역의 이정은, 현수의 친구 역 김선영 등 배우들의 고른 호연 속에 김혜수의 상처받은 표정 연기가 마음을 흔든다. 그가 어머니의 거액 빚을 2012년 알게 된 뒤 변제하고 인연을 끊은 사실이 알려진 게 지난해 7월. 이 영화 촬영 직전이다.

이번 영화에선 섬 주민 순천댁 역의 이정은(왼쪽)과 김혜수 등 여성 배우들이 주연으로 뭉쳐 끈끈한 호흡을 선보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번 영화에선 섬 주민 순천댁 역의 이정은(왼쪽)과 김혜수 등 여성 배우들이 주연으로 뭉쳐 끈끈한 호흡을 선보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6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이 영화를 만나기에 가장 최적의 컨디션일 때 만났고 그래서 더 내 작품처럼 느껴졌다”면서 “요즘 관객에겐 느리고 서정적인 감정 위주 영화가 따라가기 힘들 수 있지만, 내가 글에서 느낀 감정·위안을 관객이 몇 명이든 손 내밀 듯 잘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작위적인 것은 최대한 배제하자”는 원칙으로 사전 작업 단계에서 박 감독, 배우들, 제작진이 모여 저마다의 내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단다. 김혜수는 과거 1년 정도 꾼 악몽을 털어놨는데, 제작진이 이를 영화에 반영했다.

“그동안 열심히 잘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 죽어 없어져 버린 느낌. 내가 다 잘못한 것 같고. 저 역시 그런 심리 상태에서 그런 꿈을 꿨어요. 영화 속 대사가 딱 그때 생각이었죠. 꿈에서 내가 죽어있는데 오래 방치된 것 같아요. 그게 막 가엾다, 너무 슬프다, 무섭다가 아니고 누가 좀 치워주지. 좀 치워라도 주지. 그 생각을 (과거에 실제) 매일 하면서 깼거든요. 아,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 죽었구나. 그게 우리 영화의 현수랑 정말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현수의 시선을 쫓다, 세진을 들여다보고, 또 순천댁을 만나며 얻게 되는 연대감 속에 비로소 자신이 처한 현실도 직시하게 됐다고 했다.

“이정은씨, 김선영씨, 노정의씨…. 잘하는 배우와 공연한 것 이상으로 촬영장에 따뜻함이 충만했어요. 그것만으로 아름답고 특별한 현장이었죠.”

이번 영화에선 실종된 소녀 세진 역의 노정의 등 여성 배우들이 주연으로 뭉쳐 끈끈한 호흡을 선보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번 영화에선 실종된 소녀 세진 역의 노정의 등 여성 배우들이 주연으로 뭉쳐 끈끈한 호흡을 선보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촬영 중엔 개인적인 얘기보단 서로 손잡고, 어깨동무하며 그 장면의 분위기에 젖어 들곤 했단다. 이번에 처음 호흡 맞춘 동갑내기 이정은과는 애틋한 사이가 됐다. “저는 ‘경이로운 정은씨’라고 불러요. 참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배우예요. 실제 순천댁같이 마음을 크게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표 안 나게, 좀 더 힘낼 수 있게 해줬죠.”

순천댁과 현수가 모든 진실을 마주하며 마지막으로 만나는 순간은 두 배우 모두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언론시사회 후 이정은과 함께 참석한 기자간담회에서 김혜수는 “촬영 전 멀리서 정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는데 그 자체로 순천댁이었다. 대본을 봐서 다 아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눈물이 나서 보니 순천댁도 똑같이 울고 있더라. 서로 손잡고 한참 울었다”면서 “촬영할 때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하는 아주 복잡하고 뭉클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했다.

열여섯에 ‘깜보’(1986)로 스크린 데뷔 후 ‘스타’로 살아온 그다. 화려한 조명 뒤 감춰온 속내도 털어놨다. “어릴 때부터 나이보다 조금 뒤처져 있었어요. 청소년기에 갑자기 연예인이 되는 바람에 삶이 좀 편협해진 것 같아요. 누구나 얻어야 할 보편적인 것을 놓치고, ‘진짜’를 받아들이기엔 저 스스로 너무 어리고 미약했던 혼돈의 시기가 있었거든요.”

연기에 대해서도 “대학 초반까지는 철없게도 재밌는 취미생활, 특별활동처럼 해왔고 더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시기가 오면서 불안해졌다. 뒤늦은 사춘기처럼 20대를 힘들게 보내고 30대가 되면서 배우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며 새로운 시도도 했지만 워낙 많은 게 부족했다”고 했다. “잘하는 배우가 되려면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데 뭘 버려야 하는지 몰랐다. 매니저한테 ‘(전)도연이는 평소에 뭘하면 저렇게 연기를 잘한대?’ ‘염정아는 평소에 영화 많이 본대?’ 묻기도 했다”면서 “그러다 저 스스로 일상성에 결핍이 있고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면은 발전했는데 어떤 면은 비어있다는 걸 느끼며 혼자 많이 불안했다”고 했다.

“충실히 살고 제대로 느끼면 나도 모르게 좋은 베이스가 쌓이지 않을까” 해서 열심히 살았지만 “표현하는 건 또 다른 영역”임을 깨달으며 또 다른 벽에도 부딪혔단다. “좋은 사람과 좋은 배우가 늘 정비례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혼자 충격받으면서”다. “그래도 아직까진 좋은 인간으로, 배우로 같이 성장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최근 다시 시를 읽고 있다며 올해 노벨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스 글릭의 ‘눈풀꽃(Snowdrops)’을 가만히 되뇌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절망을 안다면 당신은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시를 읽으면 따뜻한 손길이 어깨를 토닥이는 것 같죠. 우리 영화가 그런 느낌이에요. 너무 마음에 와 닿았어요.”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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