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 김혜수 "실제 죽은 채 방치된 꿈 1년 꿨죠"

중앙일보

입력 2020.11.08 11:01

업데이트 2020.11.08 11:38

영화 '내가 죽던 날' 주연 배우 김혜수를 6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영화 '내가 죽던 날' 주연 배우 김혜수를 6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목을 봤을 때 이미 마음을 빼앗긴 느낌이었어요. 저한테는 운명 같은 영화죠.”

12일 개봉하는 새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에서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형사 현수를 연기한 김혜수(50)의 말이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 소송으로 고통받던 현수는 복직 전 외딴 섬에서 실종된 한 소녀의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섬으로 향하지만, 믿었던 가족에게 배신당한 소녀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12일 개봉 영화 '내가 죽던 날' 주연
남편 외도로 이혼 소송 중인 형사 역
이정은·노정의·김선영…女연대 뭉클

"과거 심리적으로 죽었던 적 있어,
이번 영화 속 악몽에 경험 반영했죠"

스타 내려놓은 김혜수의 민낯 

실종된 소녀 세진 역의 신예 노정의, 목격자인 순천댁 역의 이정은, 현수의 친구 역 김선영 등 배우들의 고른 호연 속에 김혜수의 상처받은 표정 연기가 마음을 흔든다. 지난해 이 영화 촬영 직전인 7월, 그가 2012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의 거액 빚 변제로 고생한 뒤 인연을 끊고 지낸 사실이 대중에 알려져 충격을 던진 터다.
6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이 영화를 만나기에 가장 최적의 컨디션일 때 만났고 그래서 더 내 작품처럼 느껴졌다”면서 “요즘 관객들에겐 좀 느리고 서정적인 감정 위주 영화가 따라가기 힘들 수 있지만, 내가 글에서 느낀 감정·위안을 관객이 몇명이든 간에 손 내밀 듯 잘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박지완 감독이 각본을 겸해 이번에 장편 연출 데뷔했다.

내가 죽어있는 꿈, 실제 1년간 꾼 악몽이죠

영화 '내가 죽던 날'은 '국가부도의 날' 이후 김혜수의 2년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형사 역할은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도 한 바 있지만 이번엔 내면 심리 묘사에 더 비중을 둔 섬세한 결의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내가 죽던 날'은 '국가부도의 날' 이후 김혜수의 2년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형사 역할은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도 한 바 있지만 이번엔 내면 심리 묘사에 더 비중을 둔 섬세한 결의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작위적인 것은 최대한 배제하자”는 원칙으로 사전 작업 단계에서 박 감독, 배우들, 주요 제작진이 모여 저마다의 내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단다. 이때 김혜수가 과거 1년 정도 꿨다고 털어놓은 악몽이 제작진의 권유로 영화에 반영됐다. 극 중 현수가 친구 민정(김선영)에게 왜 자신이 세진의 감정, 외로움에 집착하는지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아이(세진)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외롭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는 게 자기(현수) 같은 거죠. 악몽을 꾸고, 깨면 낯선 장소여서 두려워하는 것도 자기 같고…” 그는 자신의 꿈이 이 순간 현수의 상황, 영화 제목과도 묘하게 일치하더라고 돌이켰다.
“그동안 열심히 잘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 죽어서 없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 내가 다 잘못한 것 같고. 저 역시 그런 심리 상태에서 실제 그런 꿈을 꿨어요. 영화 속 대사가 딱 그때 생각이었죠. 꿈에서 내가 죽어있는데 죽고 나서 오래 방치된 것 같아요. 그게 막 가엾다, 너무 슬프다, 무섭다가 아니고 누가 좀 치워주지. 좀 치워라도 주지. 그 생각을 (과거에 실제) 매일 하면서 깼거든요. 알죠, 제 스스로도. 아,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 죽었구나. 그게 우리 영화의 현수랑 정말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동갑 이정은과 복잡하고 뭉클한 연대 나눠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실종된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 역의 이정은(왼쪽부터)과 형사 현수 역의 김혜수. 두 배우는 이번이 함께한 첫 작품이란 게 놀라울 만큼 긴밀한 호흡을 주고받는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실종된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 역의 이정은(왼쪽부터)과 형사 현수 역의 김혜수. 두 배우는 이번이 함께한 첫 작품이란 게 놀라울 만큼 긴밀한 호흡을 주고받는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현수의 시선을 쫓다, 세진을 들여다보게 되고, 또 순천댁을 만나며 얻게 되는 연대감 속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현실도 직시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정은씨, 김선영씨, 노정의씨…. 잘하는 배우와 공연한 것 이상으로 촬영장에 따뜻함이 충만했어요. 그것만으로 아름답고 특별한 현장이었죠.”

촬영 중엔 개인적인 얘기보단 서로 손잡고, 어깨동무하며 그 장면의 분위기에 젖어 들곤 했단다. 특히 이번에 처음 호흡 맞춘 동갑내기 이정은과는 서로 눈만 마주쳐도 눈물 나는 애틋한 사이가 됐다. “저는 경이로운 정은씨, 이렇게 부르는데 참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배우에요. 실제 순천댁 같이 마음을 크게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표 안 나게, 조용히, 좀 더 용기 낼 수 있게, 힘낼 수 있게 해줬죠.”

순천댁과 현수가 모든 진실을 마주하며 마지막으로 만나는 순간은 두 배우 모두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언론시사회 후 이정은과 함께 참석한 기자간담회에서 김혜수는 “촬영 전 멀리서 정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는데 그 자체로 순천댁이었다. 대본을 봐서 다 아는 상황인데도 그렇게 눈물이 나서 보니 순천댁도 똑같이 울고 있더라. 서로 손잡고 한참 울었다”면서 “촬영할 때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대하는 아주 복잡하고 뭉클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했다.

도연이는 뭘하면 저렇게 연기 잘한대? 묻기도 했죠 

영화에서 대형 범죄 사건 용의자의 가족이자 주요 증인으로 섬에 유폐된 소녀 세진. 실종되기 전 그가 임시 거처의 CCTV에 남긴 얼굴을 보며 현수는 자신의 표정과 닮아있다고 느낀다. 바로 믿었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사람의 얼굴이다. 김혜수는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에서 대형 범죄 사건 용의자의 가족이자 주요 증인으로 섬에 유폐된 소녀 세진. 실종되기 전 그가 임시 거처의 CCTV에 남긴 얼굴을 보며 현수는 자신의 표정과 닮아있다고 느낀다. 바로 믿었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사람의 얼굴이다. 김혜수는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열여섯에 ‘깜보’(1986)로 스크린 데뷔 후 ‘스타’로 살아온 그다. 화려한 조명 뒤에 감춰온 속내도 털어놨다. “어릴 때부터 나이보다 조금 뒤처져 있었다”면서 “청소년기에 갑자기 연예인이 되는 바람에 삶이 좀 편협해진 것 같다. 누구나 얻어야 할 보편적인 것을 놓치고, ‘진짜’를 받아들이기엔 제 스스로 너무 어리고 미약했던 혼돈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연기에 대해서도 “대학 초반까지는 철없게도 재밌는 취미생활, 특별활동처럼 해왔고 더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시기가 오면서 불안해졌다. 뒤늦은 사춘기처럼 20대를 힘들게 보내고 30대가 되면서 배우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며 새롭게 시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워낙 많은 것이 부족했다”고 했다. “잘하는 배우가 되려면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데 뭘 버려야하는지 몰랐다. 매니저한테 ‘(전)도연이는 평소에 뭘하면 저렇게 연기를 잘한대?’ ‘염정아는 평소에 영화 많이 본대?’ 묻기도 했다”면서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저 스스로 일상성에 결핍이 있고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면은 집중적으로 발전했는데 어떤 면은 너무 비어있다는 걸 느끼면서 혼자 많이 불안했다”고 했다.

늘 일치하진 않지만,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 꿈꾸죠

여전히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를 꿈꾼다는 김혜수(오른쪽부터)는 "이번 영화에서 배우 김선영, 이정은을 만난 게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큰 의미였다"고 돌이켰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여전히 좋은 사람이자 좋은 배우를 꿈꾼다는 김혜수(오른쪽부터)는 "이번 영화에서 배우 김선영, 이정은을 만난 게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큰 의미였다"고 돌이켰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충실히 살고 제대로 느끼면 나도 모르게 좋은 베이스가 쌓이지 않을까” 해서 열심히 살았지만 “표현하는 건 또 다른 영역”임을 깨달으며 또 다른 벽에도 부딪혔단다. “좋은 사람과 좋은 배우가 늘 정비례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혼자 충격받으면서”다. “그래도 아직까진 좋은 인간으로, 배우로 같이 성장하고 싶다”고 했다.
“그 순간에는 성장을 기대하거나 알기 어렵지만 지나고 나면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란 존재 같아요.” 그는 최근 다시 시를 읽고 있다며 올해 노벨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스 글릭의 ‘눈풀꽃(Snowdrops)’을 가만히 되뇌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절망을 안다면 당신은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시를 읽으면 따뜻한 손길이 어깨를 토닥이는 것 같죠. 우리 영화가 그런 느낌이에요. 너무 마음에 와 닿았어요.”

배우 김혜수가 말하는 좋은 배우
드라마 '눈이 부시게'. [사진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사진 JTBC]

 한때 “좋은 선배 연기자들은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란 자격지심에 똑바로 인사도 못했다”는 김혜수는 요즘도 “좋은 배우는 선배 같고 어른 같아서 후배여도 꼭 존칭한다”고 했다. “그런 배우를 만나는 순간이 배우로는 가장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죠. 그건 선후배가 없는 것 같아요.”
가장 우러러보는 배우론 김혜자를 꼽았다. “선생님은 브라운관, 스크린, 봉사활동 현장이건 잠깐 눈빛만 스쳐도, 음성만 들려도 감동이 있어요. 그분의 삶의 궤적이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연기 이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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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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