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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더듬던 바이든, 불행한 가족사 딛고 美대통령 꿈 이루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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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6일(현지시간)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대통령을 꿈꾸던 바이든은 어려운 환경, 불행한 가족사를 딛고 삼수 끝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6일(현지시간)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대통령을 꿈꾸던 바이든은 어려운 환경, 불행한 가족사를 딛고 삼수 끝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대시(-)'
말 더듬는 버릇이 있던 소년 조 바이든(78)의 유년시절 별칭이다. 또래 친구들은 그를 흉내내 '바-바-바이든'이라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좌절할 법도 하건만 소년 바이든은 그때부터 '말로 먹고사는 직업'인 정치인, 그것도 대통령을 꿈꿨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결코 불평하지도, 설명하려 들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돌을 입에 물고 발음 연습을 하거나, 문장을 통째로 외워 읽기도 했다.

.조 바이든의 어린시절.

.조 바이든의 어린시절.

그로부터 60여년. '말더듬이' 바이든은 '방송 스타' 출신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대선에서 맞붙어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불복 선언과 '줄소송' 공세를 넘는다면 대권 도전 3수만에 '최고령 대통령'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바이든은 누구? #상원의원 당선 직후 첫번째 부인과 딸 잃어 #부통령 땐 '자신의 분신' 첫째 아들 보도 세상 떠나 #대통령 도전 '삼수' 만에 美 역사상 최고령으로 대선 승리

그는 1942년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났다. 로마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출신 증조부모가 미국으로 이민 와 터 잡은 곳이다.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면 존 F. 케네디에 이은 두 번째 가톨릭 신자 출신 대통령이 된다.

초등학교도 가톨릭 미션스쿨에 진학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지프 바이든 시니어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1950년대 바이든가는 델라웨어주로 이주했다. 지금도 바이든의 자택이 있는 곳이다.

반려견 이름도 '상원의원(senator)'

26세의 조 바이든. [부통령 인스타그램]

26세의 조 바이든. [부통령 인스타그램]

1961년 델라웨어 대학교에 입학해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후 시러큐스대 로스쿨에 진학했을 당시 첫 아내 네일리아 헌터를 만나 결혼했다.1969년 변호사로 개업하고 델라웨어주 뉴캐슬 카운티 의회 의원으로 정치권에도 처음 발을 들였다. 그 사이 두 아들 보, 헌터와 딸 나오미 바이든을 얻었다. 바이든은 네일리아와 장모를 처음 만났을 때도 자신의 목표는 대통령이라고 밝혔다. 반려견의 이름은 '상원의원(Senate)'으로 지었다.

29세였던 1972년 11월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에 최연소로 당선됐다. 화려한 데뷔였다. 현역의원이자 공화당 거물 정치인인 케일럽 보그스를 상대로 대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바이든은 내리 36년을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으로 지냈고 2009년부터는 부통령직 8년, 2020년부터는 대통령직을 시작하는 기록을 세우게됐다. 재선에 성공해 임기를 마치면 선거 제도 하에서 보내는 정치 경력만 52년이 된다.

최연소 당선과 함께 찾아온 시련

첫번째 부인 닐리아와 조 바이든의 가족 사진.

첫번째 부인 닐리아와 조 바이든의 가족 사진.

불행의 그늘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경력이지만, 바이든이 큰 시련과 함께 정치 여정을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상원의원에 당선되자마자 부인과 딸 나오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보와 헌터도 이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바이든은 이때 의원직을 포기하려 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1973년 자신의 첫 취임식 선서를 두 아들의 병실에서 했다. 이후 36년간 그는 아들들이 사는 델라웨어와 워싱턴 D.C까지 왕복 4시간을 기차로 출퇴근했다. 기차 출퇴근은 부통령 당선 후 방탄 차량이 나오면서 끝났다.

바이든은 2007년에 쓴 자신의 자서전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에서 이 사건으로 겪었던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 신을 원망했고,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이 하필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를 되풀이해 물었다. 그러다 바이든은 '많은 이들이 불행을 겪고서도 뚜벅뚜벅 하루를 산다. 불행을 겪는 사람이 나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제서야 신과 "화해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1977년 두번째 동반자인 질 바이든과 결혼식을 올리고 딸 애슐리를 낳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네일리아 외 처음으로 절대적인 끌림을 느꼈다"고 질을 만난 순간을 회고했다.

아들 사망 후 나온 기사로 경선 포기하기도   

조 바이든 가족. 왼쪽부터 둘째 아들인 헌터 바이든, 부인 질 바이든, 조 바이든, 막내 딸 애슐리 바이든, 장남 보 바이든.

조 바이든 가족. 왼쪽부터 둘째 아들인 헌터 바이든, 부인 질 바이든, 조 바이든, 막내 딸 애슐리 바이든, 장남 보 바이든.

스스로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시련을 겪었다. 1988년 오랜 꿈이었던 대선에 첫 도전을 하려 민주당 경선에 나갔다가 표절 시비에 휘말려 출마를 포기한 뒤 뇌동맥류로 쓰러져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다. 훗날 바이든은 만약 자신이 민주당 경선에서 낙마하지 않았다면 선거 운동을 하다 아예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두번째 대권에 도전한 2008년은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에 밀려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낙마했다. 대신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됐다.

부통령직을 마무리할 즈음인 2015년에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아들 보가 세상을 떠났다.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고 항암 투병을 한 지 1년만이었다. 바이든은 2019년에 낸 에세이 『조 바이든, 약속해 주세요 아버지』를 통해 승산이 없는 싸움을 치르는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로서 겪은 아픔을 털어놨다. 보는 죽음을 앞두고 "용기를 내 아버지의 길을 가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보가 세상을 떠나고 몇달 뒤 민주당 경선 출마를 고려할 때 '바이든 본인이 아들의 마지막 소원을 세상에 흘렸다'는 제목의 폴리티코 기사가 터져나왔다. 경선을 포기한 그는 후에 "예상을 뛰어넘는, 견디기 어려운 공격이었다"고 털어놨다.

바이든 일대기.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바이든 일대기.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리고서야 바이든의 시간이 왔다. 2019년 민주당 경선에서 후보들이 바이든 지지를 선언하고 출마를 포기하면서다. 그동안 바이든은 중도 실용적인 성향의 정치인으로 '선명성' 경쟁을 하지 않는 재미없는 후보였다. 대신 중도적 입장으로 양쪽에서 비판을 받는 일이 잦았다. 낙태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밝히면서도 낙태를 공개적으로 찬성해 좌파와 우파, 가톨릭 교계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으로서는 1991년 걸프전에 반대했으면서도 동유럽으로의 NATO 확대와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은 지지했다. 2002년 이라크 전쟁 결의안을 지지했지만, 2007년 미군 증파에는 반대했다. 상원 법사위원장으로서 마약 정책과 흉악범죄 방지, 인권법안 서명을 이끌었다.

'3수 대통령' DJ 넥타이 간직하기도 

2001년 청와대에서 조 바이든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을 접견 중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청와대사진기자단]

2001년 청와대에서 조 바이든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을 접견 중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청와대사진기자단]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특별한 인연도 주목받는다. 바이든은 김 전 대통령이 1980년대 초 미국에 망명했을 때부터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 전 대통령이 수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직에 오른 스토리는 바이든에게도 영감을 줬다. 이미 경선에서 한차례 낙마를 경험한 뒤 2001년 청와대에서 고인과 재회했을 때 그는 김 전 대통령에게 "넥타이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두 사람은 즉석에서 넥타이를 바꿔 멨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넥타이에는 수프 자국이 묻어 있었는데 바이든은 이를 지우지 않고 소중히 보관해왔다고 한다. 그의 넥타이를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바이든은 김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지도자로 언급해왔고, 당시 부시 행정부를 향해 "햇볕정책만이 북핵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2013년 부통령 자격으로 한국에 다시 방문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만났다. 그때 그는 "미국은 한국에 베팅했다"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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