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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50년]"공작원 4명 사형뒤 대방동 묻어"···진실 다시 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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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정부가 오는 12월 ‘실미도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할 방침이다. 국방부는 12월 10일 출범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1호 사건으로 실미도의 재조사를 추진 중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최근 “실미도 사건을 최우선으로 조사하도록 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한 뒤 해산한 이후 10년 만에 독립 기구로 재출범한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정부, 15년 만의 재조사

진실화해위, 12월 실미도 사건 재조사 추진

중앙일보는 실미도 부대 공작원의 위령제가 열린 8월 하순부터 이달 7일까지 16회에 걸쳐 실미도 사건을 재조명했다. 1960년대 말 냉전 속 남북한이 극도로 대립하던 시기 국가에 의해 감금당한 채 인권을 유린당하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건의 실체를 알리고 희생된 청년 30여명의 한을 달리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본지는 2006년 발표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보고서를 근간으로 정부의 비공개 문서(국방부 내부 업무보고서 등)와 실미도 사건의 주요 관계자를 추가로 취재해 보도했다.

“생존 공작원 4명 사형한 후 대방동에 묻어”

본지 보도 과정에서 1971년 8월 서울 대방동 총격전 당시 생존 공작원 4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암매장된 장소가 새로 드러났다. 김중권 전 공군본부 검찰부장은 인터뷰에서 “공작원 4명을 사형한 후 서울 대방동에 묻었다”고 증언했다. 또 공작원 4명이 사형을 선고받고도 상고를 하지 않은 것은 군 관계자들로부터 “상고를 포기하면 베트남전에 파병시켜주겠다”는 회유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다. 이제 유족들은 “12월 출범할 진실화해위원회가 생존공작원 4명의 암매장지를 발굴해 시신을 돌려줄 것”을 간절히 촉구하고 있다.

실미도 사건은 1999년에 소설로, 2003년엔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사실 일부를 반영하면서도 극적 효과를 위해 허구를 섞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국방부가 2005년 과거사진상규명위를 설치하고 실미도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에 나선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국방부의 진상 조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와 불법행위도 진상규명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그동안 각종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국가기관의 은폐와 비협조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런 시비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2004년 8월 15일·노무현 대통령 광복절 축사)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이 자폭한 직후 서울 대방동 현장. 중앙포토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이 자폭한 직후 서울 대방동 현장. 중앙포토

50주년 맞아 진상 규명해 역사에 기록해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는 그러나 실미도 사건의 매듭을 짓지 못했다. 국방부 내 임시 조직으로 설립되면서 법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사건 관계자 상당수의 협조를 받는 데 실패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정리법)’에 근거한 진실화해위원회는 10년 전 진상규명위의 한계를 극복해 사건의 진상을 역사에 기록하고, 청년들 그리고 가족들의 한(恨)을 풀어주기를 촉구한다. 고(故) 임성빈 공작원 여동생의 말을 끝으로 ‘실미도 50년’ 기획을 마무리한다. 사건으로 희생된 모든 분의 영면을 기원한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실미도 사건은 영원히 진상 규명을 완료하지 못한 채 묻힐 것입니다. ‘서울 대방동 총격전(1971년 8월 23일)’ 50주년이 되는 내년 8월 23일 전에 진상 규명이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오빠,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다 눈도 못 감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한을 제발 풀어주세요.”

실미도 사건 요약

1968년 1월 21일 북한 ‘김신조 부대’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청와대 앞에서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노한 박 대통령은 “김신조 부대와 비슷한 부대를 만들어 보복하라”고 지시했다.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지휘 아래 공군은 1968년 4월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공작원 수는 김신조 부대와 같이 31명이었다. 육·해·공 3군 중 공군이 나선 건 비행기로 침투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당초 공군은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사형수나 무기수 사이에서 공작원을 모집하려 했다.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죄수를 관리하는 법무부가 제동을 걸었고, 결국 공군은 죄수가 아닌 평범한 20~30대 청년 31명을 ‘훈련 6개월 후 북한 침투작전’ 조건으로 선발했다. 지키지도 못할 특급 보상을 약속하면서다.

공작원의 신분은 애매모호했다. 공작원들에게 군번을 주며 “장교 후보생”이라고 공지했지만, 실제 군번은 가짜였고 서류상에는 민간인으로 분류했다. 부대의 지휘 라인도 불분명했다. 공군 소속이었지만, 중앙정보부의 지휘를 받았다.

훈련 과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공작원들이 구타를 당하는 건 일상이었다. 달리기 훈련 중 “속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위협 사격을 받다 관통상을 당하거나 안전장비 없이 외줄 타기를 하다 추락해 머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급식이 열악해져 일부 공작원은 부대 내 개밥이나 돼지 먹이를 훔쳐먹었다. 월급은 초기 3개월만 조금씩 나오고 끊겼다. 또한 휴가는커녕 외출과 서신 왕래 등이 금지돼 사실상 감금 상태로 생활했다. 훈련 기간은 약속했던 6개월을 훌쩍 넘었다.

훈련 시작 1년 반가량 만인 1969년 10월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선발대가 백령도로 올라가 전초기지를 세우고 대기할 무렵 상부에서 “회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남북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 분위기를 탄 탓이다.

이후 북한 침투작전은 보류됐고, 실미도 부대의 지옥훈련은 기약 없이 계속됐다. “부대를 해체하고 공작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정부는 “기다리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심각한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1968년 7월부터 1970년 11월까지 공작원 7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이 탈출 등을 시도하다 법적 절차 없이 처형당했다. 몽둥이로 맞아 죽거나 대검에 찔려 살해됐다. 남은 공작원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까지 커졌다.

부대 내에선 공작원들을 달래기 위해 땜질식 대책을 내놓았다. 성욕을 해소해주겠다며 성매매를 시켜주고 전염병을 치료하겠다며 해골 물을 마시게 했다.

1971년 8월 23일. 참다못한 공작원 24명은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인천 시내에 상륙한 뒤엔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높은 분’들에게 호소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군과 경찰은 이들에게 총을 쏘며 저지했고,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공작원들의 버스는 서울 대방동에서 멈춰 서야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공작원들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자폭했다.

대낮 서울 한복판에서 대형 참사가 벌어졌지만, 정부는 진상을 왜곡하기 바빴다. ‘무장공비 침투’ ‘군 특수범 난동’ 등으로 거짓말을 하며 실미도 부대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려 했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사이 실미도 안에서 부대 관련 서류를 소각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버스 자폭에서 생존한 공작원 4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며 회유와 협박이 가해졌다.

공군 수사당국은 축소 수사로 일관했다. 실미도 안에서의 인권 유린 사건들은 물론 공작원들을 제외한 기간병·민간인·경찰 등 43명이 사상한 경위조차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에서 실미도 부대로 내려간 예산이 대거 횡령된 정황도 포착됐지만, 이 역시 유야무야됐다. 아울러 수사당국은 공작원 4명을 구속해놓곤 가족에게 알리지도, 변호인 선임권을 고지하지도 않았다.

생존 공작원들은 실미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초병으로 근무하던 기간병 1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공작원 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됐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모처에 암매장됐다.

김민중·심석용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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