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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칸딘스키 vs ‘차가운’ 몬드리안…추상화도 극과 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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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47〉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다. 정치적·경제적 통합에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려있을 때, 뜬금없이 ‘심리적 장벽’의 문제를 제기한 이가 있었다. 동독의 심리학자 한스 요아힘 마츠(77)다. 억압적 사회구조는 개개인의 심리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 수십 년간 사회주의정권하에 살았던 동독 주민들에게는 ‘감정 정체’라는 집단적 정서장애가 존재한다고 마츠는 주장했다.

예술은 내적 필연성서 출발 #칸딘스키의 추상화 깊은 울림 #몬드리안은 ‘직선만이 객관적’ #초록색 놓고 평온·혐오 엇갈려

‘감정 정체’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 불가능에 있다. 소통은 정서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이를 서로 흉내 내며 공유하는 과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동독인들의 ‘감정 정체’라는 집단적 정서장애는 통일 후에도 동·서독 간에 ‘심리적 장벽’이라는 또 다른 견고한 장벽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마츠는 예언했다(한반도가 통일된다면 ‘심리적 장벽’의 문제는 독일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단언컨대, 한반도의 ‘심리적 통합’은 분단의 정서적 상처를 경험한 이들이 죄다 사라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1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있는 몬드리안의 ‘구성’(1927). 2 뮌헨 렌바흐하우스 미술관에 있는 칸딘스키의 ‘즉흥 계곡’(1914·부분).

1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있는 몬드리안의 ‘구성’(1927). 2 뮌헨 렌바흐하우스 미술관에 있는 칸딘스키의 ‘즉흥 계곡’(1914·부분).

촘촘한 감시체제로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한 사회주의 동독에서 주민들은 내면의 정서적 경험을 외면하며 억압하는 방식으로 순응했다는 것이다. 정서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외면한 것이다. 동독 주민의 ‘감정 정체’는 동독의 정신 의료체제, 가족제도를 통해 은밀하게 강화되었다고 마츠는 고발했다. 마츠의 예언대로 동·서독간의 ‘심리적 장벽’은 통일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사실 ‘감정 정체’는 그리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비슷한 개념이 이미 7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도 논의되고 있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피터 시프너스(1920~2008)는 불안과 같은 심리적 증상이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정신신체장애’를 연구하던 중, 이 증상을 지닌 환자들에게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72년 그는 정서를 인지하는 능력, 정서적 경험과 신체감각을 구별하는 능력, 그리고 정서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능력에 장애가 있는 상태를 일컬어 ‘감정표현불능증’이라 이름 붙였다.

‘감정표현불능증’은 대인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정서적 경험을 인지하지 못하면 타인의 정서적 경험 또한 유추할 수 없다.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의사소통에서 공감 능력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상대방의 정서적 상태를 공유할 수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은 일어날 수 없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정서표현을 흉내 내는 ‘거울뉴런’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유는 ‘정서 공유’가 의사소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정서 공유에 기초한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이 어려워진 것은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기초한 물질주의가 대세가 된 산업사회의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감각적 정서 공유가 어려워진 21세기 네트워크사회에서 이 소통 불가능 현상은 극한 형태로 치닫고 있다. 가장 발달된 네트워크 사회인 한국에서의 양극화된 정치적 갈등 양상이나 트럼프의 트위터로 야기된 저 황당한 미국의 상황을 보라. 감각적 정서 공유의 부재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동독인들, 소통 불능의 ‘감정 정체’ 겪어

산업사회로의 급속한 이행이 진행되던 20세기 초반, 의사소통행위의 가장 극적인 형태인 예술에서 감정이 가지는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앞서 주장한 이가 있었다. "예술은 내면의 깊은 정서적 경험의 표현”이라고 주장한 바실리 칸딘스키다. 1911년 출판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와 ‘청기사연감’에 수록된 글에서 칸딘스키는 “회화는 외부대상의 모방이 아닌 ‘내적 필연성’에서 나와야 한다”고 반복해 주장한다.

‘내적 필연성’이란 예술가의 감정을 뜻한다. 예술가 내면의 감정에서 비롯된 예술작품은 관람자에게도 유사한 감정을 일으킨다. 예술 작품을 매개로 예술가와 관람자가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 예술 작품은 성공한 것이다. 이때, 그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든 극도의 추상적 작품이든, 그 형식은 어떠해도 좋다는 것이 칸딘스키의 주장이다.

‘내적 필연성’의 예술을 주장하는 칸딘스키의 추상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거울뉴런’을 통한 정서 공유의 의사소통 이론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칸딘스키가 위대한 거다. 추상회화를 주장한 이는 칸딘스키 말고도 많다. 그러나 감정과 추상의 관계를 이렇게 깊게 파고든 이는 없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정서적 경험, 즉 내적 필연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칸딘스키의 주장은 앞서 설명한 세기말의 ‘빈 모더니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비합리적 존재’인 인간의 발견, 그리고 ‘자기분석’이라는 방법론을 통한 ‘자아의 재편집’이라는 빈 모더니즘의 성과는 알로이스 리글(1858~1905)의 ‘예술 욕구’개념과 빌헬름 보링거(1881~1965)의 책  『추상과 감정이입』을 거쳐 칸딘스키의 ‘내적 필연성’으로 이어졌다.

예술양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양식이란 그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 즉 자신의 욕구에 맞게 세계를 해석하려는 ‘예술 욕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리글의 주장이다. 따라서 아무리 사소하고, 빈약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주체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계 맺는 고유한 방식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리글의 ‘예술 욕구’ 개념으로부터 예술의 주관적, 심리적 해석이 본격 시작된다. 보링거는 ‘예술 욕구’를 다시 ‘감정이입 충동’과 ‘추상 충동’으로 구분했고, 칸딘스키는 보링거의 ‘추상 충동’을 ‘내적 필연성’이라는 예술가 개인의 정서적 경험으로 구체화했다. 기존 회화기법을 기초부터 흔들어버리는 ‘표현주의’라는 독일 특유의 강력한 심리주의적 흐름도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때부터 비로소 예술가의 주체적 내면세계가 예술적 창조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게 된다. 예술가들을 억누르고 있는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는 덤으로 얻어졌다(지금이야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상을 얼마나 똑같이 그릴 수 있는가의 ‘기교’가 예술성의 척도였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주장이다). 이른바 ‘창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칸딘스키와 같은 시기에 등장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같은 추상을 추구하지만, 이 둘은 서로 극과 극이다. 흔히들 몬드리안의 시도를 ‘차가운 추상’, 칸딘스키의 경우를 ‘뜨거운 추상’으로 표현한다. 애매하다. 칸딘스키는 ‘정서적, 감정적 추상’, 몬드리안은 ‘인지적, 이성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분명하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대상의 재현’이라는 전통적 회화관을 거부한다. 그는 회화의 구성요소를 최대한 단순화했다. 수직과 수평의 직선, 그리고 그 직선의 관계인 직각만으로 형태를 추구했다. 선은 항상 직각으로 만나야 한다. 그래야 질서 잡힌, 조화로운 조형이 되기 때문이다. 곡선은 물론, 방향이 애매한 사선도 거부한다.

괴테 색채론, 칸딘스키보다 100년 앞서

직선만이 모든 사물의 핵심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다. 몬드리안은 직선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도형의 편집을 통해 개별성을 초월한 보편성의 추상회화를 추구했다. 당연히 각 개인의 독특한 정서적 경험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이성적 질서의 구현이 몬드리안이 추구한 추상의 목표다. 그는 색채의 사용 또한 빨강·파랑·노랑의 삼원색과 흰색·회색·검은색의 기본적인 무채색으로 제한했다. 자연의 초록색은 거의 혐오했다. 무질서하고 변하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의 추상은 변치 않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질서의 구현, 즉 이성의 최고치를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정반대 편에 있다. 내적 필연성의 표현에 적합하다면 어떤 형태라도 가능하다. 주로 곡선을 많이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기하학적 도형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칸딘스키의 책에는 형태보다는 색채에 관한 서술이 훨씬 더 많다. 색에 대한 칸딘스키의 지극히 주관적이며 감정적인 설명을 한번 읽어보자.

“밝은 푸른색은 플루트와, 어두운 푸른색은 첼로와 유사하며, 짙은 색조는 콘트라베이스의 경이로운 음향과 유사하다. 그리고 깊고 장중한 형식을 갖춘 푸른색의 음향은 파이프오르간의 저음과 비교할 수 있다. 노랑은 예민해지기 쉬우나, 강렬하게 심화해 침잠할 수는 없다. 반면에 파랑은 예민해지기 어렵고 강렬하게 상승할 수도 없다. 정반대로 다른 이 두색을 혼합해 이상적인 균형을 얻은 것이 초록색이다…완전한 초록색은 존재하는 모든 색 중에 가장 평온한 색이다.” (칸딘스키/권영필역,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90~91쪽, 열화당)

몬드리안이 그렇게 괴로워했던 초록색이 칸딘스키에게는 참으로 평온한 색이었다.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 칸딘스키의 추상, 특히 그의 색채론은 참으로 심리학적이다. 전쟁 동안 러시아에 머물던 칸딘스키가 독일로 돌아와 22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선생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바이마르는 괴테의 도시였고, 괴테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색채이론가였기 때문이다. 뉴턴의 광학이론에 기초한 객관적 색채론과 대립되는 괴테의 색채론은 칸딘스키 그것보다 백여 년 앞선 탁월한 색채심리학이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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