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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비켜간 ‘갬성 상권’…주택 골목 ‘~리단길’ 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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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호 12면

변화하는 서울 상권

연리단길에는 평일 저녁에도 음식점과 카페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김나윤 기자

연리단길에는 평일 저녁에도 음식점과 카페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김나윤 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정문 앞 놀이터에는 주인 잃은 노점상 가판대 10대가 먼지만 쌓인 채 보도블록을 따라 멈춰 서 있다. 맞은편 1층 점포들엔 떨어진 간판 자국과 ‘상가 임대’ 현수막이 줄지어 걸려 있다. 층당 20평 남짓의 4층짜리 빌딩 전체가 무권리금 매물로 나와 있기도 하다. 빈 점포들 사이에서 불이 켜진 대형 화장품 브랜드 매장에는 직원 2명이 손님 없는 매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북적대는 송리·용리·연리단길 #주택가 ‘끼 있는 가게’ 공통점 #SNS 타고 20~30대 왁자지껄 #월세 올라도 매물 얻기 어려워 #홍대·신촌은 ‘무권리금’ 속출 #강남도 공실률 2년 새 3배 늘어

홍대 놀이터 인근 공인중개업소에 ‘무권리금’ 매물판들이 붙어 있다. 김나윤 기자

홍대 놀이터 인근 공인중개업소에 ‘무권리금’ 매물판들이 붙어 있다. 김나윤 기자

‘홍대 놀이터’라 불리는 이 골목은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홍대 상권 중 가장 임대료가 높은 곳이었다. 권리금만 7억원을 호가했다. 홍익대 정문에서 클럽 골목으로 이어지는 구간이라 늘 젊은이들로 북적였기 때문이다. 각종 공연, 벼룩시장부터 연예인 길거리 인터뷰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어 한산하다. 심지어 온라인에선 ‘폐가촌’이라 불릴 정도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기본 억 단위 권리금을 주고서라도 들어오고 싶어하던 상가들이었는데 지금은 권리금이 없이 몇 달째 비어있다”며 “홍대에 무권리금 매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상권 상황을 보여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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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대학가인 신촌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이날 2호선 신촌역에서 연세대 정문까지 이르는 600m 연세로엔 간판 대신 ‘임대’ 현수막이 걸린 1층 점포만 10곳. 2~3층 점포와 이면도로에 자리 잡은 폐점포는 세기가 어려울 정도다. 신촌역 공인중개업소 대표는 “권리금 5억짜리 1층 82.5㎡(약 25평) 가게가 3월부터 비어있다”며 “같은 건물의 2층 가게까지 나가면서 건물주가 권리금 없이 임대에 나선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대료 올라 제2 경리단길 전락 우려

서울 핵심 상권들이 흔들리고 있다. 경기 불황 속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덮치면서 주요 상권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홍대입구, 신촌, 강남역(강남대로) 일대엔 텅 빈 점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무권리금 매물이란 현수막까지 걸려있다. 이른바 ‘바닥피’라 불리는 권리금은 임차인이 다음 임차인에게 상가 점포를 넘길 때 받는 웃돈으로 부동산 경기를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상권 내 무권리금 매물이 많다는 건 영업난으로 서둘러 가게를 접으려는 임차인이 많다는 의미다. 유동인구가 많아 ‘상권 불패신화’를 자랑했던 주요 대학가와 도심 상권이 불경기에 속수무책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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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감정원에 따르면 2018년 2분기 기준 홍대·합정, 신촌 지역의 3층 이상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각각 6.5%, 6.8%였다. 서울 전체 평균 공실률(7.4%)보다 낮았다. 지하철 강남역이 위치한 강남대로의 공실률은 2.6%로 강남 상권 중 최저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올해 2분기 홍대·합정의 공실률은 8.5%, 신촌은 10.5%에 달했다. 강남대로의 공실은 3배 넘게 증가해 서울 평균(7.9%)을 훌쩍 넘어섰다.

연세로에서 프랜차이즈 빙수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은 “요즘 대학생들이 우리 때처럼 술 먹는 문화가 많이 없어졌다”라며 “유동인구가 줄다 보니 프랜차이즈도 과거보다 매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20년째 연세로에서 호떡 노점을 운영하는 박순덕씨는 “예전엔 권리금이나 월세를 높게 주고서라도 들어오고 싶어 난리였던 동네였는데 지금은 여기(연세대) 학생 아니면 굳이 찾아올 필요가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용리단길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주택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골목을 구경하려는 젊은이들이 많다. 김나윤 기자

용리단길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주택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골목을 구경하려는 젊은이들이 많다. 김나윤 기자

반면 비싼 임대료에도 매물을 찾는 예비 임대인과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으로 북적이는 신흥 상권도 있다. 송파구 석촌호수 주변 ‘송리단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서 3호선 삼각지역까지 이어지는 ‘용리단길’, 연남동 주택가 ‘연리단길’엔 신장개업 가게들과 1시간씩 기다리는 대기 줄이 즐비하다. 지난달 20일 서울 송파동 송리단길에서는 왕복 2차선 도로 양옆으로 새롭게 인테리어를 하고 ‘갬성(감성을 온라인에서 부르는 말)’ 간판을 내건 음식점, 사진관, 꽃 가게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대부분 33㎡(약 10평) 안팎의 작은 점포로 20~30년 된 오래된 2~3층 상가 건물 1층에 들어서 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돈가스, 마라탕, 곱창 식당 안에는 20~30대 젊은 사람들로 발 디들 틈 없었다. 한창 인테리어 공사 중인 신규 점포도 3곳이나 됐다. 모두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박상인 공인중개사는 “월세가 3.3㎡당 15만원 수준으로 3년만에 50% 올랐는데도 매물을 구하기 어려워 오전에만 3명이 빈손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신용산역 1번 출구 앞 용산우체국 뒤편엔 일본식 분위기의 식당과 카페가 늘어서 있다.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로 낙후된 주거지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2017년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 들어서고 외부인 유입이 많아지면서 식당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경기 불황에 코로나19까지 덮치면서 신촌역 주변 상가에는 빈 점포가 빠르게 늘고 있다. 김나윤 기자

경기 불황에 코로나19까지 덮치면서 신촌역 주변 상가에는 빈 점포가 빠르게 늘고 있다. 김나윤 기자

이 골목 상권들은 기존 중대형 상가가 밀집한 상권과는 달리 주택가에서 시작했다는 게 특징이다. 전통적인 서울 상권은 대학가나 지하철역을 끼고 있으면서 고층 상가가 밀집해 있다. 큰 임대 평수 탓에 임대료도 높아 개인보단 기업형 매장이 유리하다. 하지만  최근 주목받고 있는 ‘~리단길’ 상권은 오래된 다세대 주택의 1층을 활용한 점포가 대다수다. 점포 크기도 작아 임차인의 개성과 가치를 담아 가게를 운영할 수 있어 예비 창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송리단길은 이른바 ‘갬성’식당을 찾는 20·30세대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김나윤 기자

송리단길은 이른바 ‘갬성’식당을 찾는 20·30세대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김나윤 기자

몇 년째 유행하고 있는 레트로 감성도 골목상권 발달에 한몫한다. 핵심 소비층으로 부상한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생)는 프랜차이즈처럼 남들과 똑같은 제품 대신 특별하고 가치있는 상품을 선호한다.

소셜미디어(SNS) 중심으로 해시태그(#) ‘나만알고싶은카페’, ‘나만알고싶은골목’ 등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상점도 발굴 한다. 류석진 서강대 지역재생 연구팀 교수(정치외교학)는 “밀레니얼은 단순히 돈을 주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받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골목에 묻은 세월의 흔적에 공감하고 특별한 가치로 인정하면서 소비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은 소음·주차난 등 골머리

상권발달이란 빛 이면엔 그림자도 있다. 계속해서 오르는 임대료 탓에 제2의 경리단길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리단길’의 원조 격인 이태원의 경리단길은 개성있는 골목 상권이었지만 높은 임대료와 코로나19로 최근 빠르게 몰락하고 있다. 지난 1월 카페 개업을 위해 용리단길에 평당 16만원 월세 계약을 한 박성현 대표는 “경리단길은 낮은 월세로 들어왔다가 급등하는 바람에 폐업한 사례가 많았지만 이곳이나 송리단길은 애초 높은 월세를 고려하고 들어오는 게 다수”라고 밝혔다.

지역 주민들은 소음과 담배 연기, 주차 대란 등 생활 불편을 토로한다. 송리단길에서 30년째 살고 있다는 할머니(67)는 “주말엔 사람과 차가 많아져 도로를 가득 메운다”며 “주민들이 구청에 민원을 많이 넣으니까 올해 들어 도로에 페인트로 차도와 인도를 구분했지만 별 효과는 없다”고 설명했다. 연리단길 다세대 주택에 사는 이은경(29)씨는 “앞 건물 1층엔 파스타 가게고 2층엔 와인 바가 들어섰다”며 “식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넘치고 밤늦게까지 음악 소리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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