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공무원 영혼 지킴이 법’ 실종 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영혼은 투자할 때만 끌어모으는 건 아니다. 현 정부 초반, 공무원들은 전임 정부에서 피폐해진 영혼을 다시 끌어모을 것을 종용받았다.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 있는 존재가 돼야지, 그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될 것입니다.” 취임 후 첫 정부 부처 업무보고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에 영혼 없이 부역했던 공직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경고였다. 전 정부에서 피해를 봤던 ‘맑은 영혼’의 공무원들이 대거 중용됐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그중 한 명이다.

‘부당 명령 거부권’ 법에 넣으려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며시 없던 일로 #지금은 ‘복종 의무’ 편리하게 이용

여권에서는 공무원 불복종권을 위한 법 개정을 추진했다. 국가공무원법 57조는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새 정부 출범도 하기 전인 2017년 1월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 경우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불복종을 권리도 아닌 아예 의무로 만들고자 했다. 정부 출범 후엔 인사혁신처가 개정안을 주도해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의결까지 받았다. ‘상관의 명령이 명백히 위법한 경우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어떠한 인사상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문구가 57조에 추가됐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영혼 없는 관료’의 취지는 덮어 둬야 했다. 베버는 대규모 조직의 효율성을 위한 이상적 모형으로 관료제를 들었고, 그 핵심 요소로 개인 감정이 배제된 공무원의 전문성을 꼽았다.

그런데 이 문구가 국회에서 실종됐다. 법 적용이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명령이 위법한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놓고 행안위 법안소위에서 이의가 제기되자 없었던 일이 돼버렸다. 요란했던 의욕에 비하면 너무 싱거운 결말이었다. 거대 여당이 자리 잡은 21대 국회에서 개정을 다시 추진한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 문구가 적절한지는 사실 따져볼 일이긴 하다. 지금도 대통령령인 공무원 행동강령에는 하급자의 이의제기나 불복종 권리가 명시돼 있다. 확실한 것은 법 개정 무산과 함께 공무원의 영혼을 보호하겠다는 시퍼런 의지도 슬며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우연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로지 복종’ 조항을 권력이 오히려 편리하게 이용하는 현실을 보면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페이스북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 복종해야 한다는 근거로 관련 법령을 나열했다. 그중에 국가공무원법 57조도 들어 있다. 친여 세력들이 윤 총장을 공격하며 내세우는 논리도 공무원의 복종 의무다. 선출 권력의 국가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돼 있긴 하지만.

청와대는 공무원 영혼 지킴이 법 무산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진 않을까. 그 법이 통과됐다면 월성 1호기는 아직도 돌아가면서 정부의 탈원전 의지를 무색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월성 1호기는 언제 멈추나’는 대통령의 말에도 영혼을 지키려는 공무원들이 뻗댔다면 어떡할 뻔했나. “7000억원 넘는 돈을 들여 보수한 원전을 엉터리 계산으로 멈출 수는 없다”며. 영혼을 삭제하듯 444개의 파일을 한밤중에 삭제해 윗선을 보호한 충성심도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바탕 소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홍남기 부총리의 ‘저항’을 보고 자신도 이제 ‘영혼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는 공무원들이 있을 법하다. 이런 고민, 여당의 20년 정권 재창출 큰소리를 믿지 못할수록 더 짙을 게다. 간만에 영혼을 내비친 홍 부총리한테 한 여당 의원이 “정치인 같다. 부적절하다”며 매섭게 꾸짖었다. 그가 공무원의 ‘불복종 의무’까지 추진했던 바로 그 의원이라는 사실을 알면 공무원들의 혼란감은 더할 것만 같다. 자꾸 공무원더러 고민하게 하는 대신 차라리 엇나가는 영혼들을 잘라 버려 ‘효율성’을 높이는 건 어떤가. 물론 그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져야겠지만.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