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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진보, 행동은 물질적 욕망 좇고 계층세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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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남좌파 & 브라만좌파

‘살롱좌파’의 대명사인 사르트르(가운데)와 그의 연인인 보부아르가 좌파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살롱좌파’의 대명사인 사르트르(가운데)와 그의 연인인 보부아르가 좌파 혁명가인 체 게바라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인물·개념

장 폴 사르트르

장 폴 사르트르

장 폴 사르트르
(1905~1980).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에서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 철학의 기틀을 다졌다. 『구토』, 『존재와 무』 등의 역작을 통해 프랑스의 대표 지성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지나치게 미화하면서 강제수용소 같은 인권유린을 묵인해 자유주의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모든 국민이 강남 살 이유 없다” #계급 장벽 논란 부른 장하성·조국 #‘내로남불’도 모자라 불평등 공고화 #386 권력의 중심엔 학연 네트워크

토마 피케티

토마 피케티

삼원사회
토마 피케티(사진)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지배계급인 사제와 귀족, 피지배계급인 평민으로 이뤄진 ‘삼원사회’로 명명했다. 현대사회도 사제에 해당하는 학력 엘리트(브라만좌파)와 귀족에 해당하는 자산 엘리트(상인우파)가 기득권을 나눠 갖고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킨다는 게 피케티의 주장이다.

강남좌파

강남좌파

강남좌파
미국에선 리무진좌파, 영국에선 샴페인사회주의자, 프랑스에선 캐비어좌파 등으로 불린다. 원래는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 진보를 칭하는 말이었는데, 최근에는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세습하는 ‘브라만좌파’로 확대됐다. 교수 등 고학력 지식인이 많고 노동 등 민생 이슈보다 이념적 이슈를 강조한다.

“미국의 꼭두각시인 이승만의 남한이 38선을 따라 정해진 국경 3곳에서 북한을 선제공격했다.” 1950년 6월 26일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L’Humanité)’의 공식 발표입니다. 사회주의가 패션처럼 유행했던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선 대한민국의 북침설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이가 장 폴 사르트르입니다.

파리국립정치학교 교수인 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등이 쓴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6·25 발발 직후 전쟁의 원인이 남한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일성의 남침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들이 나왔을 때는 “북한이 미국의 유인 전략에 빠져 전쟁을 시작했다”는 궤변을 늘어놨죠.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인 사르트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지성입니다. 그의 학문적 성과 못지않게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 등 사생활로도 큰 유명세를 떨쳤고요. 특히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물질적 향유로 점철된 그의 삶은 늘 논란의 중심이었습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머릿속과 말에서만 급진적이었고 삶에서는 부르주아적 모순 투성이었다”며 “어지러운 사생활과 배치되는 선동적인 진보 레토릭으로 지식인 사회를 평정했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프랑스에선 사르트르처럼 고급 살롱의 문화를 즐기며 진보를 자칭하는 소위 ‘살롱좌파’가 많았습니다.

사르트르의 모순된 삶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 중 일부는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대표적인 이가 유년시절부터 친구였던 레이몽 아롱입니다. 아롱은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 좋은 좌파는 정직할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죠. 그는 ‘살롱좌파’의 위선을 꼬집으며 “사회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르트르는 국민영웅 샤를 드골을 ‘프랑스의 히틀러’라고 비난하고, 『수용소 군도』에서 소련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시대착오적 인물”이라며 폄훼했습니다. 윤평중 교수는 “사르트르가 강제수용소 같은 인권탄압을 잘 알면서도 소련을 옹호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환멸을 느낀 ‘절친’ 메를로 퐁티와 알베르 카뮈 등도 그의 곁을 떠났죠.

프랑스엔 살롱좌파, 한국엔 강남좌파

반세기가 훌쩍 지난 한국에는 ‘살롱좌파’ 대신 ‘강남좌파’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강남좌파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정의대로 “정치적·이념적으로는 좌파지만 소득수준과 라이프스타일은 강남주민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실제로 현 정권에는 말로만 진보를 외치고 행동으로는 물질적 욕망을 실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통령의 입’이던 김의겸은 청와대 대변인 시절인 2018년 7월 흑석동 재개발 지역의 건물을 25억7000만원에 매입 후 2019년 12월 34억5000만원에 매각했습니다.

노영민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서울 반포의 아파트는 놔두고 자신의 지역구인 청주의 집만 팔겠다고 했다가 ‘똘똘한 한 채’ 비판에 휘말렸습니다. 논란 끝에 반포 아파트까지 매각했지만, 8억 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거뒀죠. 강남 다주택 논란을 빚은 김조원 민정수석은 끝내 청와대를 떠날 때까지 아파트를 팔지 않았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면서 뒤에선 그 이익을 가장 먼저 챙기는 정권 실세들의 모습에 많은 국민이 실망했습니다. 특히 ‘386’ 정치인들의 다수는 말로는 평등, 반미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누구보다 자본주의적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죠.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집권세력조차 정책과 반대로 행동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기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더해 강남좌파는 말과 행동의 괴리에 빠진 살롱좌파에만 머물지 않고 불평등 구조를 공고화하는 브라만좌파가 되려하고 있습니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학력 엘리트인 브라만좌파가 자산 엘리트인 상인우파와 결탁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양극화 구조를 공고히 한다”고 말합니다. “부를 재분배하고 서민층을 대변하는 원래의 좌파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좇는 데 그치지 않고, 학력과 주거지로 구분되는 계급 차별의 울타리를 높이면서 세습을 통해 계층 이동의 희망사다리를 차버리고 있는 것이죠. 결국 브라만좌파와 상인우파 모두 기득권이라는 게 피케티의 주장입니다.

『꿈을 쌓아두는 사람들(Dream Hoarders)』의 저자인 리처드 리브스의 문제의식도 비슷합니다. “고학력 부모들이 최고의 학교에 자녀를 보내 사회·경제적 부를 대물림하며 구조적 장벽을 쌓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대학입시는 인턴 기회가 많은 응시자에게 유리하도록 설정돼 있고, 명문대 입시를 통해 만들어진 거대한 특권의 산꼭대기가 존재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특히 “포틀랜드·뉴욕·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 모여 살면서 다른 계층이 학군 좋은 지역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죠.

조국·장하성은 브라만좌파

장하성(左), 조국(右)

장하성(左), 조국(右)

한국에선 강남좌파의 원조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장하성 주중대사가 대표적인 브라만좌파입니다. 두 사람 모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막대한 자산을 축적했습니다. 각각 미국의 버클리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공부했고, 유명대학(서울·고려대) 교수 출신이라는 뛰어난 스펙도 갖췄죠. 문재인 정부의 실세로 부와 명예는 물론 권력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두 사람은 ‘내로남불’에만 그치지 않고, 계층의 장벽까지 쌓는 모습을 보입니다. 장 대사는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인 2018년 9월 “모든 국민이 강남에 살 이유는 없다, 저도 강남에 살기에 드리는 말씀”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3년간 그의 잠실 아파트는 10억 원이 넘게 올랐고, 여론은 ‘왜 당신만 강남에 살아야 하느냐’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죠.

조 전 장관은 트위터에서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용이 되지 않고 개천에서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입시 편법 논란 이후 본인의 아들·딸만 용으로 만들려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죠. 고교생이 SCI급 의학논문의 저자가 되는 것은 부모가 학력 엘리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학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세습하는 진보 인사들의 이중성은 조 전 장관만의 일이 아닙니다. 유시민과 전·현직 교육감인 곽노현·조희연·김승환 등은 외국어고·자사고 폐지를 외치면서 정작 자신들의 자녀는 외고를 보냈습니다. 평등 교육을 강조해온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의 세 딸은 강남의 학교를 나왔고요. 반미·반일을 외쳤던 이인영·윤미향 등 여권 인사들은 학비가 비싼 스위스·미국 등지에 자녀를 유학 보냈죠.

현 집권세력이 정치, 검찰, 언론, 재벌 등 각 분야의 개혁에 소리 높이면서도 학벌 타파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그들의 가장 큰 권력이 학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학연으로 맺어진 80년대 민주화운동과 90년대 시민운동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누구누구의 친구이거나 선후배로 강력한 결속력을 보입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386세대는 학연·지연·혈연의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는 ‘연대’의 원리를 터득해 시민사회와 국가를 점유하고 위계구조의 상층을 ‘과잉 점유’했다”고 비판합니다(『불평등의 세대』). 교내외 학생회·서클 등을 조직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거대한 기득권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죠.

그 결과 네트워크 안에 있는 ‘내 편’이면 무조건 감싸지만(박원순·윤미향·조국 등), 그 밖에 있으면 과감하게 버립니다. 부동산 차명 의혹을 받은 양정숙 의원과 재산신고를 누락한 김홍업 의원을 빠르게 ‘손절’한 게 대표적이죠.

이런 상황에서 정말 “분노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현재의 집권세력은 가짜 진보”라는 김경률 회계사의 말처럼 이들이 스스로를 계속 진보라고 부르도록 내버려 둬도 되는지 ‘진짜 진보’에게 묻습니다. 원로 지식인 홍세화 선생의 말대로 “(가짜 진보에게) 진보라는 개념을 뺏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니까요.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