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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어느 선량한 관리자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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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지난달 28일 오전 인천시 아파트에서 53세 여성 관리소장 이모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씨는 피를 흘리며 관리사무소에 쓰러져 있는 상태로 직원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병원 도착 직후 사망 판정을 받았다. 흉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진단됐다.

주민 대표의 전횡에 맞서 싸우던 #아파트 관리소장 안타깝게 숨져 #홍남기 부총리의 무소신과 대비

관리사무소 측의 신고를 받은 인천 서부경찰서는 즉각 수사에 나섰다. 폐쇄회로(CC)TV 영상이 있어 용의자가 곧바로 드러났다. 영상에는 이 아파트 입주자 대표인 63세 남성 이모씨가 흉기로 관리소장을 찌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범행 뒤 몸을 숨겼던 그는 당일 오후 경찰에 자진 출석했다. 법원은 지난달 30일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관리사무소 직원 등에 따르면 입주자 대표 이씨는 최근 아파트 관리비를 보관하는 은행 계좌의 명의를 바꿨다. 아파트 관리비 계좌는 관리소장과 입주자 대표의 공동명의로 돼 있어 두 사람이 도장을 찍어야 출금할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런데 입주자 대표 이씨가 자신 단독 명의로 변경하고 비밀번호까지 교체한 것이었다. 이 일은 관리소장의 항의로 다시 바로잡히기는 했지만 이후 입주자 대표의 ‘갑질’이 한층 심해졌다.

숨진 관리소장의 동료들에 따르면 입주자 대표 이씨는 자신에게 할당된 활동비를 올려 달라, 나를 집으로 초대하라 등의 요구도 했다. 집에 가 봐야 어떻게 사는지를 알고, 그래야 신뢰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관리소장이 이런 무리한 주문을 거절하면 “내가 주민 대표인데, 나를 무시하느냐” “내가 주인이고, 너는 우리가 주는 돈 받는 사람 아니냐” 등의 말로 윽박질렀다.

입주자 대표는 급기야 관리소장이 부정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자신에게 관리비 계좌를 안 맡기는 게 수상함의 증거라고 우겼다. 그러자 관리소장은 외부 기관에 관리비 사용에 대한 감사를 스스로 요청했다. 사건 발생 때도 감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입주자 대표 이씨는 집에서 흉기를 챙겨 관리사무소로 갔다. 무엇이 범행을 촉발했는지는 경찰이 확인 중이다.

이 아파트에 분향소가 차려졌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 인천지부가 주민 동의를 얻어 마련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뒤늦게 입주자 대표의 횡포로 관리소장이 고통을 겪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6년간 이 아파트 관리를 맡아 온 책임감 있고 선량한 관리자의 의로운 저항을 기리며 애도했다. 이 사건 뒤 청와대 게시판에는 공동주택관리사들을 보호할 법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수만 명이 동의를 표시했다.

이 비극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국민의 대표자인 대통령과 여당의 말을 듣지 않느냐”는 억지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으니 범죄자로 몰려 감찰을 당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곤욕을 치른다. 그의 죄는 관리소장이 관리비 계좌를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범죄에 눈을 감지 않았던 것뿐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검찰에 자기 뜻을 따르라고 강요하면서 인사권과 감찰권을 마구 휘두르는 것을 고상하게도 ‘민주적 통제’라고 칭했다. 관리소장처럼 윤 총장이 원칙을 고수하자 “총장이랍시고, 내 명을 거역한다”고 우악스럽게 공격했다. 위임받은 권한의 범위·용도에 대한 인식이 입주자 대표 이씨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다. 그는 선량한 관리자에게 주어진 책무를 아는 것 같기는 하다. 나라 곳간의 열쇠를 지키려고 여당에 맞서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늘 얼마 못 가 “인사권자의 뜻”을 받든다며 백기 투항한다. 그러니 나라 살림 관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의 뒤탈을 걱정해 면피성 쇼만 한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한다. 곳간 문을 열어준 그가 반려된 사표를 손에 쥐고 다시 자리에 앉은 지금, 아파트 관리소장의 소신과 용기가 더욱 빛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