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대 있게 노는 삶이 행복하지 아니한가" 김병기 교수 서예전

중앙일보

입력 2020.11.04 17:44

업데이트 2020.11.04 18:22

'불변응만변', 175x95cm, 한지에 먹, 2019.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 번 변하는 것에 대응하자'는 뜻.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저녁 상해에서 썼던 구절이다. [사진 김병기]

'불변응만변', 175x95cm, 한지에 먹, 2019.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 번 변하는 것에 대응하자'는 뜻.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저녁 상해에서 썼던 구절이다. [사진 김병기]

서예가 심석(心石)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의 서예전이 7일 전북 전주 전북대박물관에서 개막한다. 2004년 백악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이후 16년 만에 처음 여는 대규모 개인전으로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내년 2월 정년퇴임을 앞둔 김 교수는 서예와 삶에 대한 생각을 담아 작품집『축원·평화·오유: 김병기의 수필이 있는 서예』(어문학사)도 출간했다. '축원·평화·오유'는 이번 전시의 주제인 동시에 서예가 가진 의미, 서예와 함께해온 그의 삶을 대변해주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전북대박물관서 7일 개막
'축원·평화·오유' 주제로 100여 점
"오유 즐기는 삶 함께 나누고 싶다"

축원,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무량수'. '한량없이 장수한다'는 뜻. 사랑하는 사람의 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진 김병기]

'무량수'. '한량없이 장수한다'는 뜻. 사랑하는 사람의 장수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진 김병기]

우선 김 교수에 따르면 "서예는 곡진한 뜻을 담아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예술"이다. 문장을 쓰는 예술로, 구체적인 뜻을 담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이름을 지어 써주고, 뜻한 길로 정진하기를 바라며 호를 지어주고, 새집으로의 이사를 축하하며 현판을 써준 일 등이 모두 축원하는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무량수(無量壽)'는 한량없이 장수한다는 뜻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장수를 비는 마음을 표현한 글이다. 나이를 쌓아간다는 의미로 가로획을 겹쳐 쌓으며 튼실한 예서체로 쓴 글씨가 단연 압권이다. 이번 전시에선 그가 잔잔하면서도 정성 들인 글씨로 축원을 표현한 다양한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평화, 글씨로 마음을 다스리다  

김 교수는 또 서예는 그 행위 자체가 '힐링'이 되는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서예는 부드러운 붓에 먹물을 묻혀 쓰는 예술이기 때문에 붓끝에 온 정신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면서 "동서고금의 명언과 명문을 골라 쓰며 자연스럽게 명상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서예를 통해 분노와 원망을 해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그에게 힘이 되어준 글자 중엔 '탄설(吞雪·눈을 삼키다)'도 있다. 그가 서예를 하며 처음 붓을 시험해 볼 때, 또 끝에 남은 먹물을 정리할 때 으레 쓰곤 했다. "가슴이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타는 가슴을 눈을 삼켜서라도 식히자'며 다짐했다"는 그는 "이 글자를 쓸 때마다 휘호 하는 사이에 정말로 가슴이 시원해지며 어려운 순간을 평화롭게 넘길 수 있도록 해줬다. 이게 바로 서예의 감동과 효과"라고 했다.

오유, 종이 위에서 추는 춤 

'오유'. 74x107cm,한지에 먹, 2018.[사진 김병기]

'오유'. 74x107cm,한지에 먹, 2018.[사진 김병기]

도천선사의 싯구. '물은 차고 밤공기도 싸늘한데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면/빈 배인 채로 달빛만 싣고서 돌아오면 되지'란 뜻이다[사진 김병기]

도천선사의 싯구. '물은 차고 밤공기도 싸늘한데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면/빈 배인 채로 달빛만 싣고서 돌아오면 되지'란 뜻이다[사진 김병기]

전시작 중 송나라 때 스님인 야부 도천선사의 시구도 눈에 띈다. '수한야냉어난멱(水寒夜冷魚難覓) 유득공선대월귀(留得空船帶月歸)'. 뜻을 풀면 '물은 차고 밤공기도 싸늘한데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면/빈 배인 채로 달빛만 싣고서 돌아오면 되지'란 뜻이다. 지난해 여름 전북대 한옥 정문에 걸 현판 글씨를 쓴 다음 "더 놀고 싶은 마음에" 욕심 없이 붓을 휘두르며 맘껏 즐긴 '오유(傲遊)'의 순간이 활달하고 웅장한 필치의 이 초서 작품에 담겼다.

서예를 가리켜 "필가묵무(筆歌墨舞), 즉 붓의 노래 먹의 춤"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순간 몰입해 누구도 출 수 없는 나만의 붓 춤을 춘 흔적이 바로 서예"라고 말했다. 그게 바로 오유(傲遊)의 경지다. '오유'는 직역하자면 '오만하게 노닐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오유란,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뼈대 있게 노는 것"이며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으면서 자존심을 지키며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경지"다. 그는 "무례하게 오만하자는 뜻이 아니다. 그저 '할 말은 하고 살자'는 뜻이다. 내가 할 말을 속 시원하게 하면서도 남을 다치지 않게 해야 진정한 오유"라고 덧붙였다.

서예가 심석 김병기. [사진 김병기]

서예가 심석 김병기. [사진 김병기]

김 교수는 유년 시절부터 부친 김형운 선생으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강암 송성용 선생의 문하에서 서예가로 성장했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하고, 제1회 원곡서예학술상을 받았다. 또 최근 5년 동안 루마니아, 헝가리,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서예전을 열며 해외에 한국 서예를 알리는 역할에도 앞장섰다.

김일로의 시 '꽃향기가 하도 매워'. 98.5x74cm,한지와 색한지에 먹, 2020. [사진 김병기]

김일로의 시 '꽃향기가 하도 매워'. 98.5x74cm,한지와 색한지에 먹, 2020. [사진 김병기]

이번 전시에선 그가 광개토대왕비와 한글 훈민정음 판본체를 융합해서 만든 그만의 독특한 한글체 작품도 다수 선보인다. 원목 통나무의 질박함과 한산 세모시의 청량하고 아삭아삭한 멋이 돋보이는 글씨다. 김 교수는 "인품이란 특별한 게 아니다. 평소의 생활 모습"이라며 "서예를 통해 내 삶을 성찰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진심으로 남이 잘되기를 바라며 축원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반문했다. 전시는 25일까지(일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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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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