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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투표로 당 헌법 파괴한 여당, 박정희 유신 수법 빼닮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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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당원투표와 중우정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내 예상이 빗나갔다. 민주당에서 당원투표를 한다기에 “유신 국민투표보다 찬성률이 높게 나올 것”이라고 썼는데, 찬성률이 86.67%로 72년 유신헌법 찬성률 91.5%보다 무려(?) 5%나 덜 나온 것이다. 민주당에서는 이를 “전 당원의 의지표출”이라 평가하며 “후보를 공천해 시민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책임정치에 더 부합한다는 이낙연 대표와 지도부 결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라고 논평했다.

결과 뻔한 투표로 의사 묻는 건 전체주의 특성 #균질화한 집단 견해는 하나로 쏠려 오답 많아 #참여민주주의가 전체주의 통치수단으로 변질 #눈 가린 문재인, 귀 막은 이낙연, 입 닫은 이재명

책임 안 지는 책임정치

태초에 성추행이 있었다. 충남도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 등 민주당에서 공천한 지자체장들이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으로 줄줄이 성추행을 저질렀다. 그뿐인가? 박원순 사건이 터지자 민주당에서는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르고 박 시장의 장례를 서울시장(葬)으로 치렀다. 피해자는 이를 보며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그 당의 지지자들은 아직도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르고 있다.

이걸로도 부족했나 보다.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겠단다. 이 참사에도 책임은 못 진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낙연 대표는 “피해여성에게 사과를 드린다”고 했다. 사과에는 책임지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그 행위란 후보를 내지 않는 것일 터이나, 그는 사과에 필요한 행동은 거부했다. 3차 가해를 저지른 셈이다. 피해여성은 그에게 “무엇에 대해 사과한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2015년 문재인 대표는 당헌에 이렇게 못 박았다.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하여 재·보선을 실시하게 될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 여기에 기초해 “새누리당이 고성에서 무책임하게 후보를 내고 또 표를 찍어달라고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당에서 자신의 혁신안을 좌초시키는 데도 한마디 말이 없다.

이 정권의 자가당착은 하도 많아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 참기 힘든 것은 이들이 자기변명을 하느라 일상언어까지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보를 공천해 시민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책임정치에 더 부합한다.” 책임의 문제를 그들은 이렇게 처리한다. 책임을 지는 대신에 아예 ‘책임’의 정의를 바꾼 것이다. 그 결과 ‘책임정치’는 이제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를 의미하게 됐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다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어디 이번만인가? 민주당에서는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늘 당원들을 소환해 왔다. 지난 총선 전 위성정당을 만들 때에도, 총선 후 위성정당과 합당할 때에도 당원투표의 형식을 빌린 바 있다. 굳이 투표함을 열어볼 필요도 없다. 늘 찬성표가 압도적 다수일 테니까. 아니, 애초에 결과가 빤하니 투표를 하는 것이다. 이 투표의 요식성은 전체주의 정당의 특성이다.

과연 투표제안문엔 오직 찬성해야 할 이유만 적혔다. “후보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며 오히려 후보 공천을 통해 시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결론도 내려준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완수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2021 재·보선의 승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래 놓고 투표를 하란다. 흡사 북한의 투표를 보는 듯하다.

박정희의 수법을 쏙 빼닮았다. 박정희는 1972년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도입하고, 그 3년 후에는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얻어냈다. 하지만 국민투표를 거쳤다고 유신에 정당성이 생기던가? 오늘날 유신헌법은 헌정의 파괴로 여겨진다. 그 짓을 지금은 민주당에서 한다. 당원투표로 당의 헌법을 파괴한다. 민주당이 미니 3공이 된 셈이다. 괴물을 비판하다가 자신들이 괴물이 된 것이다.

2015년 대권 주자였던 민주당의 문재인 대표는 ‘책임정치’를 표방하며 불공천 방안이 담긴 당의 혁신안을 발표했다. 5년이 흐른 2020년 민주당의 이낙연 대표는 그 혁신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대권 행보를 시작한다. 이것이 민주당의 현주소다. 과거의 민주당은 그래도 미래로 나아가려 했으나, 현재의 민주당은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최근 민주당의 거의 모든 행보에 이 퇴행성이 보인다.

희미한 숙의 민주주의의 추억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당원투표의 취지는 참여민주주의의 확대에 있었을 게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가끔 대의가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당의 지도부에서 대의에서 벗어난 결정을 내릴 경우 평당원들이 투표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이를 견제하라는 뜻이리라. 그 훌륭한 제도가 외려 지도부의 그릇된 결정을 눈감고 추인해 주는 절차로 변질된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정부는 집권 초 신고리 5·6호 원전 건설 여부를 ‘숙의 민주주의’에 맡겼다. 시민들은 찬반 양쪽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서로 이성적 토론을 한 끝에 원전 건설 여부를 표결로 결정했다. 비록 결론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 결정을 존중했던 것은 그것이 숙의 민주주의를 거쳐 내려진 판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당원 투표에는 이런 ‘숙의’와 ‘토론’의 과정이 빠져 있다. 위성정당을 만들 때는 양정철이 들고 온 선거 시뮬레이션 시나리오가 그것을 대체했다. 이번 당헌 개정에서는 반대의견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투표제안문에도 반대이유는 소개조차 되어 있지 않다. “장사꾼도 신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던 이재명 경기지사도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정치는 생물”이라며 말을 뒤집었다.

투표에 참가한 당원은 대부분 대통령을 지키는 전사들. 애초에 숙의나 토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대선주자마저 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판에 내부에 토론이 이뤄질 리 없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이 전투적 열정으로 뭉친 에너지 덩어리에 의사를 묻는 것은 요식행위일 뿐. 민주당의 지도부는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당원투표를 활용하는 것이다.

집단만 있고 지성은 없다

민주주의 제도도 이렇게 특정한 ‘조건’ 아래서는 전체주의 투표로 귀결된다. 그 ‘조건’이란 집단의 균질화. 전사의 집단은 이질적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견을 가진 이는 배척된다. 이물질이 제거될수록 집단은 더 순수해지고 더 극렬해진다. 스스로 당헌을 파괴하는 데에 무려 86.7%가 찬성을 표했다는 것은 당원들의 균질화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보여준다.

이들의 활동을 ‘집단지성’이라 미화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실험에 따르면 집단지성은 집단의 성원들이 저마다 개인으로서 이질성을 유지할 때에 가장 잘 작동한다. 균질화한 집단에서는 전체의 판단이 하나의 견해로 쏠리게 되는데, 그렇게 내려진 집단의 판단은 대부분 오답이라고 한다. 이 맥락에서 전체가 쏠리는 그 ‘하나의’ 견해는 물론 민주당 지도부의 것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 지지층은 그렇게 친문의 친위부대로 전락해갔다. 이를 더욱더 부채질하는 것은 청와대 청원 제도다. 듣자 하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판한 검사들을 파면하라는 청원에 서명한 이가 벌써 40만이라고 한다. 이 직접민주주의의 제도 역시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대중과 지도자의 직접적 결합’이라는 전체주의적 통치수단으로 변질된다. 이때 대중은 권력의 홍위병으로 전락하게 된다.

취지대로라면 당원투표는 지도부의 명분 없는 후보 공천을 철회시키는 데에 사용돼야 했다. 청와대 청원은 법무부의 초법적인 행태를 멈춰달라고 호소하는 데에 사용됐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제도들은 권력에 ‘반하여’가 아니라 권력을 ‘위하여’ 가동되고 있다. 청원 40만에 발맞추어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이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메시지를 냈다. 대중에게 총공격의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던 참여민주주의는 이 정부에서 민중민주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당이 ‘민중주의’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 중 이 말의 뜻을 알아듣는 이는 하나도 없다. 최근 그 당 의원들의 지적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다. 무지한 그들은 자신들의 민중주의가 참여민주주의라고 굳게 착각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당원 투표할 일이 많을 게다.

압도적인 찬성으로 당헌에 한 문장이 추가됐다. ‘단, 전 당원 투표로 달리 정할 수 있다.’ 이 말로써 그 앞의 무공천 조항은 사실상 폐기된다. 일본 닛코의 세 원숭이처럼 문재인 대통령은 눈을 가렸고, 이낙연 대표는 귀를 막았고, 이재명 지사는 입을 닫았다. 이렇게 눈과 귀와 입을 막은 채 민주당은 몰락해 간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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