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염재호 칼럼

과거의 덫과 미래의 꿈

중앙일보

입력 2020.11.04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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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지난 십여년간 우리 정치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문화가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동안 정치는 정쟁에 빠져 나라와 국민을 돌보지 않았다. 새 정부는 이전 정부를 부정하고 자신의 실정은 이전 정부의 탓으로 돌렸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보면 같은 당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전 정부의 작은 잘못도 침소봉대하여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고 모든 공적은 송두리째 부정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들은 자살하거나 투옥되는 비참한 퇴임을 맞았다. 마치 조선시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는 사화를 연상시킨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한풀이 정치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수극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나.

과거의 덫에 빠져 불안한 사회
미래의 꿈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
창조적 파괴로만 얻을 수 있는 미래
판단 유보하는 무당층 두려워해야

협치는 없고 극단적 대결만 남은 우리 정치는 국민을 편 갈라 정략적 이익을 도모하는 선동적 정치에 몰입한다.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문제를 만들어낸다. 국회는 표를 의식한 이익 대변으로 규제법안을 양산하고, 국정감사에서는 호통으로 야단치기나 자기 편 감싸기만 하지, 합리적 비판이나 건설적 대안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가 국민을 과거의 덫에 빠트려 미래를 못 보게 한다. 적폐청산, 토착왜구, 검찰개혁, 재벌해체, 친일청산. 끝없이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려고 한다. 우리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하기보다는 과거를 무기삼아 상대편 무너뜨리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 3년의 국정운영도 적폐청산과 검찰개혁, 그리고 코로나 방역만으로 세월을 허비했다.

정치가 미래의 꿈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거의 덫에 빠져 있으니까 사회는 불안해진다. 공동체의 밝은 미래를 함께 만들기보다는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빠진다. 대기업 공채나 공무원시험에 젊은이들이 올인한다. 유연한 노동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나누어 갖기 보다는 안정된 직업을 나 혼자 보장받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대기업 공채시험은 조선시대 신분상승의 과거시험과 같다. 9급공무원 시험 합격률은 2%도 안 되는데 30만명 가까운 공무원 준비생들이 노량진 학원가에서 컵밥을 먹어가며 몇 년씩 도전한다. 젊은이들의 소중한 시간과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부동산 공인중개사 시험에 올해 34만명이 지원했다. 얼마 전 한국형 뉴딜로 부동산IT개발시스템 도입이 이야기되자 공인중개사들이 생존권 사수 시위를 벌였다. 아파트의 인터넷거래시스템 도입은 언제든 가능한데 이익집단의 반발로 정치권이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정부 고위관료는 한탄한다. 그런데도 매년 2만명 정도의 공인중개사가 꾸준히 배출된다. 9급공무원 시험,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위한 사설학원의 광고는 지하철역과 방송에서 매일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유혹한다. IT와 AI의 미래가 다가오는데 우리는 개인택시기사들의 반발로 우버, 타다 등이 발을 못 붙이는 과거의 덫에 빠져 있다.

지난 주 전남 목포의 고등학교에서 미래를 주제로 한 특강을 했는데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정부가 수능 중심의 정시비중을 높이자 주말이면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서 강남 학원을 다닌다고 한다. 교육부는 지난 십년 가까이 고등학교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학생생활기록부를 입시에 활용하도록 했다. 입시학원에서 배우는 수능준비가 아니라 고교현장에서 선생님들의 평가를 우선하고 수업도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 문제해결형 토론위주로 바뀌고 있었다. 입학사정관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위해 교육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등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대학입시를 유도했다. 그런데 시행 초기 이 제도를 악용하는 일부 학부모들의 일탈행위가 나타났다. 이제는 고교와 대학이 끝없는 개선작업을 통해 많이 자리를 잡았지만, 조국사태로 불거진 대입 공정성의 이슈로 다시 사교육이 판치는 수능중심의 대학입시가 부활하는 과거의 덫으로 정부가 정책을 선회했다.

과거의 덫에 빠지면 과거의 잘잘못만을 따지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볼 여유가 없다. 과거의 잘못을 고치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개인이나 사회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미래를 꿈꾸지 않는 정치,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정부,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미래를 꿈꾼 이건희 회장의 삼성은 결국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전자기업이 되었다. 과거를 과감하게 버리는 창조적 파괴가 없으면 미래를 얻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꿈은 무엇인가. 정말 우리 한국과 국민 모두를 위한 미래의 꿈을 꾸고는 있는 건가.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은 많아도 한국의 미래를 꿈꾸는 정치인은 보기 어렵다. 장기집권과 정권탈환만 꿈꾸는 정당들의 미래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4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자만하는 여당이나 20%대에서 갈팡질팡하는 야당은 30%대를 꾸준히 유지하며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무당층을 두려워해야 한다. 과거에 볼모 잡히지 않고 미래의 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무당층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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